-노동자의 권리를 너무 쉽게 앗아가는 이들

과거 갑질은 통용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고 세대가 변하면서 수직적 문화는 점점 수평적 문화로 변모해 갔다. 이 시대적 변화에 뒤처지는 것이 바로 갑의 위치에서 상대적 약자를 비난하고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이다. 아직도 갑질문화는 만연해 있으며 달라지지 않고 있어 갑질에 대한 인식전환이 어느때보다 요구되고 있다. <그래픽_황성환 그래픽1팀 팀장>
과거 갑질은 통용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고 세대가 변하면서 수직적 문화는 점점 수평적 문화로 변모해 갔다. 이 시대적 변화에 뒤처지는 것이 바로 갑의 위치에서 상대적 약자를 비난하고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이다. 아직도 갑질문화는 만연해 있으며 달라지지 않고 있어 갑질에 대한 인식전환이 어느때보다 요구되고 있다. <그래픽_황성환 그래픽1팀 팀장>

이렇게 하라. 하지만...


#. ‘신분을 확인해야 하니 신분증을 제시하고 헬멧을 벗어라. 하지만 마스크는 써라.’

#. ‘음식 냄새가 나니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타지 마라. 하지만 입주민은 테이크아웃한 음식을 들고 탈 수 있다.’

#. ‘사고 위험이 있으니 지상에서 다니지 마라. 하지만 비 오는 날 오토바이를 탄 채 미끄러운 경사로로 내려가라.’

코로나 19로 배달 이용이 폭증하는 요즘, 배달 노동자들이 빈번히 겪고 있는 문제 중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몇 가지를 적었다. 얼핏 봐도 상당히 모순되는 요청들이다. 사람들은 이를 ‘갑질’이라 부른다.


갑질 아파트, 갑질 빌딩...


지난 2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배달서비스지부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갑질 아파트/빌딩 문제 해결을 위한 진정’이었다. 해당 지부는 지난달 25일부터 일주일간 여러 음식 배달 대행업체 소속 조합원 4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지부가 지난 31일 공개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음식 배달 노동자에 대해 이뤄지는 갑질 유형’에 관한 설문 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다. 서울 지역 아파트 81곳이 그 대상인 이 조사에서, ‘단지 내 도보로만 배달 가능한’ 곳은 54곳, 즉 66%에 달했다. 두 번째로 많은 수를 차지한 항목은 ‘지하 주차장만 이용 가능’이었다. 앞에서 적었듯,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배달원은 미끄러운 지하 주차장 경사로를 통해야만’ 배달이 가능한 것이다.


고객으로서 권리 주장, 뭐가 문제?


고객으로서 주장하는 권리에 어떤 문제가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어떤 노동자는 한여름 헬멧을 벗은 채 땀에 찌든 본인의 모습을 보고 수치심을 느꼈다. 또 어떤 노동자는 화물 취급을 받아야 했고. 또 어떤 노동자는 안전할 권리를 일부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너무 빈번하게, ‘시간’을 포기해야 했다. 배달 노동자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부터 400m를 왕복할 시간 동안 더 많은 배달을 하고 수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해당 아파트들의 갑질 고객은 배달 노동자에게 금전적 손해를 끼친 것이다.

심지어 이런 기피 아파트로의 배달을 거절할 경우, 배달 노동자는 또 한참을 기다려야 다음 일을 얻을 수 있었다. 갑질 아파트 수가 전체의 절반을 훌쩍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 사실상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또 노동자가 철저히 약자의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노동과 시간은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정말로 아파트 입주민의 안전과 단지 내 위생에 너무 신경이 쓰였다면, 그간 입주민들에게 바람직한 선택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답은 ‘아예 배달을 시키지 않거나’, ‘추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입주민들은 약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시간, 곧 노동자의 돈을 빼앗음으로써 ‘갑질’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자신의 편의와 시간이 중요해서 배달을 선택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갑질 입주민들은, 자신이 앗고 있는 것에 무지했다. 어느 노동, 그리고 시간의 고유한 가치. 그에 대한 권리. 모두, 자신의 노동과 시간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이라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째서 잊었는가.


신개념 갑질...


대기업 갑질, VIP 갑질은 들어 봤어도 ‘갑질 건물’을 들어 보긴 처음이다. 그야말로 ‘신개념 갑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가끔 새로운 방식으로 그 바닥을 드러낸다.

인간이니까. 더 편안한 환경, 더 쾌적한 환경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강자 앞에서는 조아리고 약자의 것을 앗는 이를 바라보자면,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또 가끔은 궁금하다.

‘누구나, 언젠가 약자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 잊기 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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