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갈등의 다수는 양극화와 그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이 낳은 결과들이다. 특히 불평등의 극단으로 치달은 갑을관계에서 갑의 탐욕과 횡포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안타까운 생명이 이미 여럿이다. 이에 <뉴스워커>는 경제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넘어서 서민의 목숨마저 위협하고 있는 대기업의 ‘갑질’ 논란을 집중 조명하고 해당 기업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봄으로써, 소비자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상생해법을 모색하는 ‘갑의 횡포,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시리즈로 연재한다.<편집자 주>

[뉴스워커_김다예 기자]  최근 몇 년 새 기업 오너들이 수행기사에게 폭언을 일삼고 폭력까지 휘두르며 ‘갑질’ 행패를 부리다가 언론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 사과하고, 고용노동부나 검찰이 조사·수사에 나서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운전 자세에 대한 지적과 욕설로 시작해서 직접적인 손찌검, 발길질에 이르기까지 ‘회장님’이 휘두르는 폭력은 집요하며 다층적이다. 모시는 분의 발 역할을 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알고 있는 수행기사는 ‘잘 풀리면’ 최측근 실세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무차별적인 막말과 폭력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 최근 종근당 이장한 회장의 운전기사 상습 폭언이 세상에 알려지면 또 다시 재벌가의 갑질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런 갑질행위는 국민적 도를 넘었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정의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 몽고식품의 김만식 전 명예회장,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 이장한 종근당 회장 / 위쪽 사진은 드라마 '미생'의 태인호 손종학의 삿대질 인증샷 <그래픽_진우현 기자>

◆ 극심한 스트레스, 급격한 체중감소, 공황장애… 병 주고 약 파는 회장님

나와 관심이 같은 사람이 본 뉴스

매출 8300억원(2016년 기준)에 이르는 국내 대표 제약사 종근당의 이장한 회장을 수행했던 기사들은 온종일 폭언에 시달리며 위험천만한 불법운전까지 강요당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회장의 폭언을 견디다 못해 그만 둔 수행기사가 최근 1년 사이에만 3명이라고 한다.

이 회장은 “애비가 뭐하는 놈인데”, “너는 월급 받고 일하는 XX야. 너한테 내가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거야” 등의 인격모독뿐만 아니라 휴대폰을 집어던지거나 조수석을 발로 차는 등 물리적 폭력까지 휘둘렀다. 게다가 파란불에 보행자가 지나고 있는데도 횡단보도를 지나가라고 하는 등 위험천만한 지시도 이어졌다.

2개월 정도 이 회장 차량을 운전했던 수행기사는 언론을 통해 “스트레스로 인해 몸무게가 7㎏이 넘게 빠졌고, 매일같이 두통약을 두 알씩 먹었다.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고 호소했다. 또 “회장의 폭언으로 공황장애가 와 회사를 그만둔 기사도 있다”고 밝혔다. 종근당이 스스로 밝힌 “생명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질병없는 건강사회 구현을 최고의 이념으로 삼고 있다”는 기업 이념이 무색해지는 행태다. 오너가 나서서 질병을 유발하고 상처를 입히고 있기 때문이다.

논란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 회장은 폭언·욕설 녹취록이 공개된 지 하루 만인 지난 14일 서울 충정로 본사 대강당에서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머리를 숙였지만, 비판 여론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갑질 논란에 더해 의사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인 발기부전치료제(종근당 ‘센돔’)를 접대용으로 임의로 제공한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경찰은 이 회장에 대한 정식 수사를 시작했고, 고용노동부에서도 내사에 착수했다.

◆ 140장에 달하는 ‘갑질’ 매뉴얼, 어기면 경위서, 벌점, 감봉까지

지난 2016년 4월 드러난 현대 비앤지스틸 정일선 사장의 ‘갑질’ 매뉴얼에는 모닝콜, 초인종 누르는 방법부터 운동복 초벌세탁 방법, 써야하는 세제의 종류까지 수행기사가 해야 할 일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매뉴얼 그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정 사장은 폭언과 폭행을 휘둘렀고 경위서까지 작성하게 했다. 매뉴얼을 하나라도 어길 경우 벌점을 매기고, 벌점이 쌓이면 감봉조치도 당했다. ‘두부를 사 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충전이 끝났는데 핸드폰을 충전기에서 분리하지 않아서’ 등 사소한 것조차 경위서를 써야했다고 한다.

정 사장의 차량을 운전했던 한 기사는 정 사장이 수시로 자신을 ‘닭대가리’라고 부르며 머리를 10~20대 때렸는데 “(정 사장이) 권투를 해서 주먹이 정말 아프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정 사장의 ‘노예 매뉴얼’과 폭력행위는 국민적 공분을 샀고,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자 정 사장은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문을 게시했지만 ‘홈페이지 사과’는 오히려 진정성 논란만 일으켰다.

이후 정 사장은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지난 3년간 운전기사 61명을 주 56시간 이상 일하게 하고 이들 중 1명을 폭행한 것으로 드러나 검찰 수사를 받았고, 지난 2월 벌금 300만원의 약식명령을 선고받았다.

◆ 사이드미러 접고 주행…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수행기사

2016년 3월 드러난 대림산업 이해욱 부회장의 ‘수행가이드’ 역시 가히 ‘갑질 끝판왕’이다.

언론에 공개된 이 부회장용 맞춤형 운전기사 수행가이드를 보면 ‘본의 아니게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절대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실언하실 경우 곧이곧대로 듣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등 폭언과 비인격적인 대우에도 그저 참아야 한다는 지침이 제시되어 있다. 특히 이 부회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각종 운전기법들을 나열하며 함께 적혀있는 ‘사이드미러 접고 주행하는 연습 필요’ 지침은 수행기사의 목숨마저 걸도록 하는 위험천만한 지시이다.

이 부회장을 수행했던 기사들은 이와 같은 지침들을 어길 경우, 고함과 함께 폭언과 폭행이 이어지며 뒤통수에서 욕설이 쏟아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창 운전 중인 기사의 머리를 뒤에서 마구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거듭되는 인격모독과 폭력을 참지 못한 기사들이 운전대를 놓으면서 1년 동안 교체된 이 부회장의 수행기사는 약 40명에 달한다. 한 명의 기사가 평균 열흘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이 부회장을 모실 수행기사는 지금도 상시모집 중이다.

복수의 전직 수행기사들이 언론을 통해 이 부회장의 만행을 폭로하고 여론의 분노가 격화되면서 결국 이 부회장은 2016년 3월 25일, 정기주주총회장에서 “모든 결과는 저의 불찰과 잘못의 결과”라며 공개 사과를 했다.

이후 2016년 4월 6일, 법원은 근로기준법 위반(2014~2015년 운전기사 2명을 상대로 수차례 폭행·폭언을 한 혐의)으로 기소된 이 부회장에게 벌금 1500만원을 선고했다.

◆ 몽고식품 111년 역사, 회장님이 나서서 먹칠

국내 대표 장류 업체인 몽고식품은 1905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 설립되었고, 배달원으로 일하던 고 김흥구 창업주(김만식 전 명예회장의 부친)가 1945년 회사를 인수하여 ‘몽고간장’을 내놓았다. 몽고간장이 ‘국민간장’으로 자리 잡으면서 회사도 꾸준히 성장했다.

2015년 대한민국을 빛낸 위대한 인물대상 산업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김만식 전 명예회장은 2015년 12월 불거진 수행기사 상습폭행 및 직원들에 대한 폭언 논란으로 결국 회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김 전 회장의 만행을 폭로한 전직 수행기사에 따르면, 평소에도 수시로 맞고 욕설을 들어야 했으며 구둣발로 낭심을 차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은 수행기사뿐만 아니라 직원들에게도 ‘돼지’, ‘병신’, ‘멍청이’ 등의 인격비하 발언을 서슴없이 했고, 환청에 시달릴 만큼 욕설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김 전 회장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몽고식품은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했지만 비난 여론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고 불매운동 조짐까지 나타났다. 결국 폭로가 이루어진지 4박 5일만인 2015년 12월 28일, 김 전 회장은 국민들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사과문만 낭독하고 불과 10분만에 서둘러 회견장을 빠져나가 사과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

고용노동부와 관할 경찰서는 김 전 회장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사용자 폭행 혐의와 상습폭행혐의로 검찰에 송치했고, 지난해 4월 벌금 700만 원으로 약식기소 됐다.

◆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가진자의 갑질 논란

재벌가 2, 3세들의 갑질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수행기사에 대한 갑질 폭행·폭언 논란은 ‘피해자들의 폭로-오너의 대국민사과-검찰 수사-벌금형’의 수순으로 일정한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 대부분 가벼운 벌금형으로 마무리되는데,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 상처와 견뎌야 했던 폭력의 수위에 비해 턱없이 가벼운 처벌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사실 당장 여론 진화를 위해 직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 다시 경영진으로 복귀가 가능하기 때문에, 또 처벌 역시 미미하기 때문에 재벌가 오너의 갑질은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막연하게 재벌가의 자성과 의식개선 노력만을 촉구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처벌 방안과 개선 조치가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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