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욱 시사칼럼니스트] 세간에 일명 ‘법꾸라지’(법률+미꾸라지)로 불리는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모르쇠’로 버티다 언론으로부터 ‘법꾸라지’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결국 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 전 실장은 그동안 ‘문화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 명단)는 보조금 집행 정책이었을 뿐’이라고 변명해왔지만 1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27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실장에 대해 “지원 배제 행위가 은밀하고 집요한 방법으로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실행됐다”며 “헌법정신을 위배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 일명 법꾸라지라 불리던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김기춘 전 실장 사진출처_YTN캡쳐, 뉴스워커 편집

또 “무엇보다 법치주의와 국가의 예술지원 공공성에 대한 문화예술계와 국민의 신뢰가 훼손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게 하고 이를 보조금 지급에 적용하게 한 행위는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아울러 김 전 실장 등이 국회에서 위증한 혐의도 유죄로 봤다.

법조계는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국회에서의 위증 행위를 유죄로 인정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51)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조 전 장관에 대해서는 “블랙리스트에 관여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위증 혐의만 유죄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조 전 장관은 이날 오후 구치소로 이동한 뒤 구속 6개월 만에 석방돼 집으로 돌아갔다. 조 전 장관은 구치소를 나서며 기자들의 심경을 묻는 질문에 대해 “재판에 끝까지 성실히 임하겠다”며 “저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짧게 답했다.

김 전 실장 지시로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진행상황을 보고한 ‘실행책’ 3인방도 이날 실형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김종덕(60) 전 문체부 장관 징역 2년, 정관주(53) 전 문체부 1차관 징역 1년 6개월, 신동철(55)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 징역 1년 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이로써 블랙리스트에 연루된 피고인들 가운데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의 1심 재판이 마무리됐다.

한편, 법무부 장관 출신인 김 전 실장은 ‘왕(王)실장’이라는 별명답게 박근혜 정부에서 최대 실세로 군림해 왔다.

김 전 실장은 법무부 검사 시절 유신헌법의 기초를 마련한 데 이어, 중앙정보부 최연소 대공수사국장으로 중용되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의 피의자, 문세광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는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김 전 실장은 박 전 대통령에게, ‘모친의 원수를 갚아준 사람’으로 통했다.

이후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 전 실장은 지난 1996년 국회에 입성해 3선 의원을 지냈는데, 이때도 친박(친 박근혜)계의 핵심 인물로 꼽히며 박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그러나 그는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부산지역 관계 기관장들을 식당에 불러 모아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부정선거를 모의한 ‘초원복집 사건’으로 음모론이나 공작정치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이 밖에도 김 전 실장은 정수장학회 졸업생 모임인 ‘상청회’ 회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으며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이어왔고, 지난 대선 때는 친박 원로그룹인 7인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에는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청와대는 물론, 내각과 사정기관을 빠르게 장악하며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했지만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혐의로 실형을 받는 ‘초라한’ 처지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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