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박경희 기자] 4개월째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베네수엘라. 유혈사태로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가운데,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극심한 식량난에 정국 혼란까지 가중되자 위기를 느낀 베네수엘라 국민 5만2000여 명이 미국 브라질 등 인근 국가에 난민 신청을 했다.

베네수엘라 정국은 이번 주가 최대 고비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오는 30일 의회해산, 개헌, 법 개정 등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는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제헌의회 선거가 강행되기 때문이다.

◆ 국제유가 하락이 불러온 파국의 위기

원유 매장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처럼 보였다. 1999년에 좌파정권인 차베스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석유산업을 국유화해 번 돈을 빈곤퇴치와 무상복지에 쏟아 부었다. 10년이 지난 뒤 50%에 달했던 빈곤율은 29.8%로 떨어졌고, 무상교육 덕분에 ‘문맹’도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2014년 하반기 이후 미국의 셰일오일산업의 등장으로 국제 유가가 하락하면서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2013년 만해도 배럴당 100달러 선을 유지했던 국제유가는 작년 중순 28달러까지 떨어졌다. 미 바클레이은행 이코노미스트 알레한드로 아리자는 “베네수엘라는 남미 산유국 중 유가 폭락의 최대 피해자”라며 “지난해 원유판매 수입이 270억달러로 전년도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외환보유고는 이달 22년만에 100달러를 밑돌았고, 베네수엘라 화폐 ‘볼리바르’는 거의 휴지조각이 됐다. 22일(현지시간) 미국의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암시장에서 볼리바르는 ‘1달러=8700볼리바르’에 거래되고 있다. 이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고시하는 공식 환율인 ‘1달러=10볼리바르’와는 80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 최대 석유생산국 베네수엘라가 국제유가하락으로 국가경제 파탄이라는 부도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그래픽_진우현 기자>

◆ 베네수엘라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가 경제파탄의 직접적 원인

베네수엘라는 수출의 90% 이상을 원유에 의존하고 식료품, 의약품 등 생필품은 수입해 쓰는 기형적인 경제구조인데다 국제유가가 고공행진할 때 벌어들인 돈으로 무상복지에 펑펑 쏟아부었다. 이러한 경제 체질은 개선하지 않은 채 차베스 집권 말기 무리한 가격 통제가 상황을 더 악화시켜 경제성장률과 인플레이션이 이어졌다. 그런데 차베스 대통령의 사도(使徒)를 자처하는 마두로 현 대통령이 집권한 뒤엔 유가폭락으로 정부 재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생필품 수입하기도 어려워졌다.

베네수엘라 오일은 생산단가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서 고유가가 지속되지 않으면 경제성이 없는데도 베네수엘라 정부는 국제유가하락에 전혀 대비 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마두로 정부가 고유가만 믿고 무분별하게 재정지출을 늘렸으며 유가하락으로 인해 감당할 만한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됐다고 언급한 바 있다.

현 마두로 베네수엘라 정부는 국제유가의 하락으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이어지자 이에 대처하겠다며 지난해 말 화폐개혁을 감행했다. 이는 마두로 정부의 무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기존 100볼리바르 지폐 사용을 중단하고 새로운 고액권 지폐 6종을 도입했지만 신권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권 통용만 금지해 오히려 혼란과 인플레이션 악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또 베네수엘라 정부는 식량난에 대처하기 위해 군부에 식량의 수입과 공급 독점권을 주고 기본 배급제를 실시했지만 군 고위 관계자들은 식량을 밀거래하거나 리베이트를 받는 등 부정을 저질렀다. 즉, 정부가 실시했던 식량난 대처 방안은 군 고위관계자들의 배만 불린 셈이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조사한 부패인식지수(CPI)에서 베네수엘라는 지난해 100점 만점에 17점으로 176개국 가운데 166번째로 나타나기도 했다.

◆ 반정부시위의 촉발

2015년 총선에서 야권은 전체 167석의 3분의 2(112석)을 차지해 집권 베네수엘라통합사회당(PSUV・55석)에 압승을 거뒀다. 20여개 야당 연합체 국민연합회의(MUD)는 여세를 몰아 대통령 탄핵과 국민소환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올 3월 친정부 성향의 대법원이 의회를 전격 해산하자 정권퇴진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폭발한 민심이 거리로 쏟아졌고, 이에 맞선 정부도 군경을 동원하여 강경진압으로 일관해 사상자가 속출했다. 4개월째 이어진 시위 과정에서 숨진 사람만 100여명이 넘는다.

게다가 마두로 대통령은 ‘파시스트 쿠데타’ 세력을 꺾겠다며 제헌의회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제헌의회은 의회 해산과 개헌, 법 개정 등 국가 최고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마두로는 구성원 545명 중 181명은 노동자, 장애인, 어부, 학생, 퇴직자 등 사회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인사들로 채운다고 발표했다. 마두로의 입맛에 맞는 이들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아 제헌의회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국가부도 사태 맞나

베네수엘라의 외환보유액이 급감하자 시장에선 베네수엘라가 연내에 국가부도 사태를 맞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인 PDVSA가 올 4분기에 갚아야 할 채무 원리금만 37억 달러에 이른다. 베네수엘라가 러시아, 중국, 중남미개발은행(CAF), 기업들에 진 장기부채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는 최근 베네수엘라 국채의 신용부도스와프(CDS) 거래 추세를 근거로 이 나라가 12개월 안에 디폴트(채무불이행)에 처할 가능성이 56%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12월 이후 최고치로 베네수엘라에서 5년 안에 디폴트 같은 신용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은 지난달 91%로 분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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