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 수용소에 있을 때나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때도, 나는 자신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배우라고 믿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한 생각으로는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그래도 내가 그렇게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 나를 구했다.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나는 고달픈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일찌감치 삶을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1889년 4월 16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두 살 무렵, 연극배우였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어머니와 이혼한 후 곧바로 사망한다. 얼마 후, 노래를 부르던 어머니마저 후두염으로 가수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 때부터 채플린은 신문팔이, 아역배우, 인쇄 보조공, 병원 잡부, 장작 패는 일 등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채플린은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그를 처음으로 무대에 세우며 들려준 ‘머리를 숙이고 땅바닥만 쳐다봐야 건질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항상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 그리곤 마침내 20세기를 통틀어 대중으로부터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배우가 되었다.

채플린이 생전에 제작한 영화는 모두 81편에 이르는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73세의 나이에 막내아들을 낳은 채플린은 평생 4번의 결혼생활을 하였다. 마지막은 54세 때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로 당시 18살이었던 우나 오닐(Oona O’Neill)과의 결혼이었다. 1977년 12월 25일, 채플린은 오닐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향년 88세.

채플린의 삶에는 희극과 비극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 역시 “세상은 내게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을 동시에 선사했다”고 술회하였다. 부모의 이혼,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정신질환, 빈민구호소와 길거리에서의 비참한 생활, 공산주의자라는 누명과 함께 찾아온 추방생활 등이 그의 인생을 어둡게 만든 비극이라면, 세계 최고의 배우이자 감독, 제작가로서 누렸던 부와 명예는 그의 삶을 밝게 비춰 준 희극일 것이다. 그런 영향으로 채플린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러므로 나는 멀리 보려고 노력한다.”

찰리 채플린은 세상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 웃음을 선물했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발하며 세계인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웠다. 그리고 그 모든 중심에는 항상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었다. 자신이 세계 최고의 배우라는 믿음, 반드시 밝고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이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끌었다. 성공을 원한다면 인생을 가까이서가 아닌 멀리서 바라보라, 인생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의 비결이다./

 
양광모 휴먼네트워크연구소장은
경희대 국문학과 졸업 후 SK텔레콤노동조합위원장, 도서출판 <목비> 대표, (주)블루웨일 대표, 한국기업교육협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작가, 청경장학회장, 머니투데이 칼럼니스트로 활동중이다. 청와대, 외교통상부, 삼성, 현대, 서울대, 전경련 등의 정부기관, 대기업,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SBS 일요스페셜>(SBS), <KBS 뉴스9>(KBS), <문화사색>(MBC), <직장학개론>(EBS), <김방희의 시사플러스>(KBS 라디오), <심현섭의 성공시대>(EBS 라디오) 등 다수의 언론방송에 출연하였다. 저서로는 <인간관계 맥을 짚어라>, <위대한 만남>, <중요한 것은 소통>, <상처는 나의 힘>, <물의 모양은 그릇이 좌우하고 사람의 운명은 인맥이 좌우한다> 등 20여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 외에 <사람이 재산이다>, <인간관계 숨겨진 법칙 인맥>, <사람이 운명이다> 등의 강의 시디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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