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박경희 기자]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기념일인 14일(현지시각) 미국 정부가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을 텔아브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날을 ‘분노의 날’로 정하고 가자지구 접경지역 등에서 3천500명이 모여 대규모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현지시각 14일 오후 8시 현재 팔레스타인 주민 최소 52명이 숨지고 2400명이 다치는 등 최악의 유혈 사태로 번졌다. 결국 미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을 재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된 것은 아닌지 우려되고 있다.

▲ 그래픽_황성환 뉴스워커 그래픽 담당

◆ 개관식 날 유혈사태, 사상자 최고

지난해 12월 6일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인정한다며 주이스라엘 대사관의 이전을 지시했었다. 이때도 팔레스타인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미국은 이스라엘 건국일에 맞춰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 이전을 착수하고 개관식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보좌관과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 스티믄 므누신 재무장관 등 800여명이 참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축하영상으로 대신했고, 트위터에 “이스라엘에 엄청난 날! 축하한다”고 올렸다. 이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역사를 만들었다”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원하고 분할되지 않는 수도”라고 화답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축배를 드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팔레스타인은 지난 3월 30일부터 이스라엘 주미 대사관 이전을 반대하며 가자지구에서 시위를 벌인 바 있다. 이로 인해 한 달 반 동안 팔레스타인 주민 40명이 숨지고 2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대사관 개관식이 있던 날은 더욱 격렬하기 시위하면서 예루살렘 검문소를 향해 행진하자, 이스라엘 군은 발포를 감행해 팔레스타인 주민 최고 52명이 숨지고 2400명이 다치는 등 2014년 가자지구 접경지에서 양측 간 갈등이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 이-팔 관계를 두고 유럽연합 균열 현상 보여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는 전날 열린 전야제에, 이스라엘에 대사관을 둔 86개국을 초청한 바 있다. 이 초청에 응한 나라는 33개국으로 알려지면서 국제사회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조치를 둘러싸고 찬반 양분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영국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미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 축하연에 서유럽 주요국이 모두 불참했고, 유럽연합(EU)에서는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4개국만 참석했으며, 그 외에 아프리카와 동남아 국가들이 참석했다. 로이터 통신은 이 부분에 대해 유럽 내 불화가 생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4년 EU에 가입한 체코, 헝가리, 2007년 가입한 루마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평소 예루살렘 문제와 관련해 미국, 이스라엘을 지지해 왔었다. 그런데 EU를 비롯한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들은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미 대사관을 옮기기로 한 트럼프의 결정을 비판해 왔다.

예루살렘의 경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자기 국경이라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갈등을 겪어 온 지역이기에 국제사회는 이곳을 어느 쪽 수도로도 인정하지 않고, 국제사회 관할 지역으로 정했기 때문에 각국은 이스라엘 대사관을 제2의 수도인 텔아비브에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국제사회의 규칙을 깨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 셈이어서 중동지역 갈등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우려를 하는 것이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안보외교 고위대표는 “예루살렘은 이·팔 두 국가의 수도가 돼야 한다”며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합병 시도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1980년대 유엔 결의안을 인용했다. 또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직간접적으로 비판했다.

EU 내 동유럽과 서유럽의 균열 양상은 난민 문제에서도 불거졌었다. 2015년 이탈리아, 그리스로 난민이 대거 유입됐을 때 난민을 분산 수용하려는 EU를 비판하는 등 EU와 대립각을 세웠는데, 이번 미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내면서 균열이 명확해진 양상이다.

◆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입장도 달라

유럽 뿐만 아니라 평소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이번 미국 대사관 이전에 대한 반응도 달랐다. 시리아 내전 문제로 미국과의 대립관계가 극에 달한 러시아의 경우 외무장관이 나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을 부채질한다며 미국을 비난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미하일 보그나노프 외무장관은 “미국의 결정은 국제사회 대부분의 입장과 배치된다”면서 “가자 지구 주변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이-팔 간의 대규모 대치전을 촉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팔레스타인과 같은 이슬람권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우방국이다. 그래서인지 미국 대사관 이전과 관련해서 별 다른 입장을 내지 않은 채 대사관 이전 소식을 서방 외신을 인용해 보도할 뿐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과 우방국이 된 것은 이란과의 관계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는 이란과 전통적인 냉전상태에 있는데, 미국이 이란과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때문에 이란은 아랍권이 아닌데도 미 대사관 이전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처럼 주 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은 이-팔 간의 관계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사이에서도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키는 불씨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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