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반대말은 신원(Identity)인 것처럼 본인의 이름이나 정체를 상대에게 드러내지 않을 때 생성되는 개념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면서 후속적인 커뮤니티도 활성화되고 있으며 민감한 사안 표출 등 접근성이 용이해졌다.

최근 불거진 한진家의 대란을 몰고 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연루된 일명 ‘땅콩 회항 사건 폭로’ 이슈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에서 기초가 됐다. 신원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고충이나 회사 내부 문제 등을 다양하게 풀어내고 사회적 용인을 가능케 했다.

▲ 최근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현대모비스 대표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된 바 있다. 신입직원과의 소통의 자리에서 무성의한 답변으로 신입직원을 당혹케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현재 이러한 글은 삭제된 상태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익명의 게시글에 대한 여론을 무시해도 되느냐에 또 다른 논란을 만들어 내고 있다.<그래픽_황성환 그래픽 담당>

이번에는 임영득 현대모비스 대표가 연루된 게시글이 올라와 여론이 들끓게 하고 있다. 임 대표가 신입직원들과 소통하는 자리에서 직원가족을 비하하는 발언 등 막말과 무책임한 답변을 늘어놨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현대모비스 측은 “익명으로 쓴 게시글만 보고 추가적인 근거나 팩트(사실)가 없는 상황에서 그에 동조하는 댓글들 몇 개로만 의혹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미디어오늘 기사를 보고 참고해서 회사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대모비스 논란을 취재한 미디어오늘은 ‘블라인드가 익명으로 사내 불만을 표현하는 공간인 만큼 왜곡과 과장이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타 언론매체들이 진위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익명의 게시글을 근거로 임 대표 기사를 다룬 것에 대해 지적했다.

물론 작성자도 익명이고 동조하는 댓글들 또한 익명으로 기재돼 해당 게시물의 진실파악이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또 허위로 꾸며진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익명으로 조성된 여론이 모두 외면당하는 것 또한 정당한 것일까? 임 대표의 행태를 주장하는 익명의 게시물 내용이 사실일지 아닐지는 당사자들만이 알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익명이 토해내는 이야기를 무시해서도 안된다는 점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등 개개인의 고민과 사연을 밝히는 장(場)에서 익명성은 필수요건으로 꼬리표처럼 붙어온다. 따라서 ‘추측성과 가능성만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자제해 달라’는 현대모비스 측의 입장 또한 익명의 여론을 묵인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여론이 통제된 환경에서 익명은 권력에 대항하는 주요 수단이 된다. 프랭크 스코필드(석호필) 박사가 3·1 만세운동의 실상과 중요함을 영자 주간지 ‘서울프레스’에 실을 수 있었던 것도 익명의 독자로부터 온 편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1959년 워싱턴포스트에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를 고발했던 것도 ‘익명의 특파원’인 언론인 리영희 씨였다.

역사의 한 켠에서 자리 잡아 나비효과를 불러온 익명의 여론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임 대표 논란이 앞면인지 뒷면인지는 밝혀져야 알겠지만 우리는 그 어느 쪽의 소리도 모두 귀 기울여 듣고자함이 최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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