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위클리 기획] 북극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의 스피츠베르겐 섬에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 최후의 날 저장고라고 불리는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가 있다.
이 저장고는 전 지구적 자연재해, 핵전쟁 등 지구상의 작물이 전멸할 수 있는 경우를 상정하여 2015년 기준 86만여 종의 종자가 500개씩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도 FAO(세계 식량 농업 기구)와 종자기탁 협정서를 체결하여 식량 작물을 중심으로 1만 3000여종의 종자를 기탁한 바 있다.

▲ 그래픽_진우현 그래픽 담당

보관을 위탁받은 종자들은 길이 27m, 너비 10m의 저장고 3개소에 보관되는데, 저장고는 영하 18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저장고의 냉동 시설에 전기 공급이 끊어지더라도 영구 동토층에 건설되어 있기 때문에 영하 3도 이하를 유지할 수 있다. 게다가 저장고는 해발 130m, 암반층 내부 120m에 건설되어 있어 해수면 상승에 대응할 수 있고, 리히터 규모 6.2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 설계가 되어있다.

최근까지 종자 보충을 위해 매년 한 차례 개방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저장고의 문이 개방되지 않았지만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중동의 종자 저장소에 보관된 종자들 일부가 손실되는 바람에 2015년 10월에 스발바르 저장고 건설 이후 최초로 저장고 내의 종자가 반출되기도 했다.

스발바르 저장고는 천재지변, 핵전쟁과 같은 사건 외에도 전염병에 의해 특정 작물이 전멸한 경우에도 저장된 종자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매년 3만 종의 생물이 멸종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현대에서 그 존재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FAO의 자료에 따를 때 2012년 바나나 생산량은 파나마 병의 변종에 의해 3.8%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변종 파나마 병에 대항할 수 있는 새 품종이 개발되지 않을 경우 수년 내에 현재의 캐번디시 바나나는 멸종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로는 현재 세계에서 생산되고 있는 바나나의 대부분이 캐번디시 품종으로 ‘유전자 다양성’이 거의 없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무성 생식은 암수의 구별 없이 몸의 일부가 떨어져서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생식법으로 생식 과정에서 유전자 변화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체와 분리된 개체는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한 특성을 가지게 된다.

바나나는 수확이 끝난 후 줄기를 자르는데 이때 잘린 줄기에서 생장지(basal shoot)라고 하는 일종의 작은 묘목 같은 것이 나온다. 농부들은 이 생장지를 옮겨 심는 방법으로 바나나를 번식시키는데 이런 번식 방법은 유전자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무성 생식의 일종이기 때문에 모체와 분리된 개체 사이의 유전자 차이는 거의 없다. 이와 같은 결과로 무성 생식으로 번식을 한 경우 모체가 특정 질병에 취약성을 보인다면 분리된 개체도 특정 질병에 취약성을 보인다.

캐번디시 품종의 바나나는 파나마 병이라고 하는 질병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계에서 재배되는 바나나 대부분은 무성 생식으로 번식한 캐번디시 품종의 바나나이기 때문에 2012년 창궐한 파나마 병의 변종에 의해 전년도 재배 물량의 3.8%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한편 바나나라고 해서 모든 품종이 파나마 병에 취약한 것은 아니다. 또한 이번 바나나 멸종 위기는 캐번디시 품종에 집중된 획일적 유전자 분포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바나나의 유전자를 다양화하는 방법으로 이번 위기를 풀어나가려 하고 있다.

지난 7월 6일 영국의 BBC 방송은 영국의 ‘큐 왕립 식물원’ 소속의 과학자들이 마다카스카르에서 병충해에 강한 야생 바나나 품종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이 발견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로는 해당 야생 바나나와 캐번디시 바나나의 유성 생식을 통해서 파나마 병을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서 2017년 11월 호주 퀸즐랜드 공과대학 연구팀은 캐번디시 바나나의 유전자를 변형하여 파나마 병에 대한 내성을 가진 품종을 개발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품종은 GMO로 취급되기 때문에 조리하지 않고 바로 섭취하는 형태가 대부분인 바나나 소비 시장에서 해당 품종에 대한 소비자들의 거부감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현재는 GMO 기술을 통한 바나나 품종 개량이 아니라 마다카스카르 바나나 같은 야생 바나나와 캐번디시 바나나의 유성 생식을 통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는 바나나 멸종 위기에서 보는 것처럼 종의 보존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종의 다양화, 유전자의 다양화도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 다음 시간에는 ‘정부 종자 산업 육성과 성과 ②한국의 종자산업 육성, 어떤 결과 나왔나’에 대해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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