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유지협약 서면없이 중소업체 자료 착취, 유사기술도면으로 타 업체 선정

국내의 한 대형 건설업체가 환기설비 업체의 기술을 탈취했다는 의혹을 받고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의 조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해당 건설업체는 타 업체에 기술을 유포하고 발주처에 추천하는 등 부정경쟁행위 정황이 제기됐다.

㈜환기연구소는 지난해 2월 건설업체가 위탁한 한미글로벌로부터 여의도 파크원(Parc1) 건물의 지하주차장 환기설비 공사를 의뢰받았다. 그 후 환기연구소는 2017년 3월부터 올 3월까지 약 1년여간 건설사의 요구(공사비 축소, 전력·소음 절감 등)대로 독자적 기술을 적용한 환기설계도면을 완성시켰다. 

▲ 그래픽_황성환 그래픽 1담당

건설업체 설계도면 요구…그 후 경쟁업체 등장
환기연구소가 공정위에 제출한 불공정거래 신고서에 따르면 2017년 4월 17일 환기연구소는 건설사의 요구에 따라 환기설비 핵심기술이 담긴 제안설계도를 건설사에 전달했다. 한 달 뒤인 2017년 5월경 지하주차장 공사현장에는 새로운 환기설비업체가 나타났다고 전했다.

이성환 환기연구소 대표는 “00건설의 요구대로 제안설계도를 제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공사현장에 A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이후 프레젠테이션에서 건설사에 당사가 전달한 제안설계도면과 거의 유사한 도면으로 A사가 발표했고 이것은 명백하게 우리 핵심기술이 유출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토로했다.

최초 PT(프레젠테이션) 평가가 있던 2017년 8월 초 건설사와 발주처, 한미글로벌, 감리업체, 설계사무소장 등 기술전문 심사평가단들이 모두 한자리에 참석했다. 이 대표는 “1차 PT 당시 A사는 당사와 유사한 기술도면을 제시했지만 건설사 측과 한미글로벌 등 평가단들은 환기연구소 측 설비제안에 ‘만장일치’로 만족했고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 수개월 뒤인 올 1월 건설사는 PT를 2차로 다시 진행했고 A사는 1차 PT 때 발표한 당사의 핵심기술력이 담긴 설비계획안과 거의 동일한 도면으로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 2차 PT 심사평가단은 건설현장 시공직원뿐, 설비효율 떨어지는 A사 도면 선정
문제는 올 1월 2차 PT에는 최초 참석했던 발주처와 한미글로벌, 감리업체 등 전문기술평가단은 자리에 없었고 건설 현장 시공직원뿐이었다는 것이다. 환기설비 전문기술 평가와는 거리가 먼 시공직원이 평가단 자리에 배석됐다는 것은 공정한 심사가 진행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2차 PT 후 건설사는 환기연구소의 ‘회사규모와 자금력’을 지적하고 A사를 발주처에 추천했다. 게다가 해당 건설사 모 부장은 이 대표에게 “A사의 환기설비가 환기연구소보다 소음이 더 심하고 에너지 소비도 많고 공사비도 더 비싼 것은 알지만 A사로 (내부에서) 결정됐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는 “상식적으로 더 좋은 기술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면 안 살 사람이 어디있겠느냐”며 “건설사는 이와 반대로 소음과 전력효율 등 설비효과가 떨어지는 견적을 더 높은 가격에 구입하는 꼴인데 내부에서 모종의 거래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분개했다.

◆ 2013년~2017년 중소기업 기술탈취 유출 519건, 피해액 6700억 넘어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 기술보호 역량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중소기업 기술탈취 유출 건수는 519건에 달했다. 총 피해액은 6709억 원 규모로 건당 12억 9000만 원의 피해를 당한 것으로 추산됐다.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대기업의 기술탈취 행태 중 하나가 협력업체의 기술자료를 다른 협력업체에 제공하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거래하기 위해서 먼저 기술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아 기술탈취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본래 원사업자가 협력업체에 기술자료를 요구할 경우에는 기술자료 명칭·범위와 요구 목적, 요구일·제공일·제공방법, 비밀유지 방법, 기술자료 권리귀속 관계, 대가 및 대가의 지급 방법, 요구가 정당함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 등 비밀유지협약을 의무적으로 체결해야 한다.

그러나 국내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부당한 기술자료 요구에도 거부하지 못하고 제공해야 하는 현실에 처해있다. 기업 생태계에서 대기업에 비밀유지계약서를 일일이 요구한다는 것은 중소기업 입장에서 일감을 놓칠 수 있다는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해외에 비해 국내는 기술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인식도 부족한 실정이다.

올해 개정된 부정경쟁방지법 제2조 제1호는 사업제안, 입찰, 공모 등 거래교섭 및 거래과정에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타인의 기술적 또는 영업상의 아이디어를 그 제공목적에 위반해 자신 또는 제3자의 영업상 이익을 위해 부정하게 사용하거나 타인에게 제공해 사용하게 하는 행위를 부정경쟁행위 유형으로 규정했다. 

◆ 기술탈취·모방 및 유용행위는 명백한 범죄행위…공정위 면밀한 수사 촉구
해당 건설업체는 환기연구소 측의 기술자료를 받을 당시, 기술 비밀유지협약서를 서면으로 작성하지 않았고 제시하지도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건설업체는 환기연구소의 핵심기술이 담긴 자료를 수차례 요구하고 취득했으며 자료를 건네받은 후 유사도면을 가진 새 업체가 등장한 점, 2차 PT에 전문 심사평가단이 참석하지 않고 시공직원이 평가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내부적으로 기술탈취 및 부정거래행위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이에 대해 건설업체 관계자는 “공정위 조사 중인 관계로 본 사안에 대해서는 답변할 수 없다”고 함구했다.
                                                                                      
일각에서는 대기업의 기술탈취가 발생하면 중소기업이 그 피해 사실을 직접 입증해야 한다는 어려움에 부딪히기 때문에 공정위가 초기에 적극적인 수사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대기업의 기술탈취·편취 및 기술모방은 유용행위이며 정부가 나설 만큼 명백한 범죄행위에 속한다고 비난했다. 나아가 무관용 원칙을 통해 대기업의 기술탈취 행위를 뿌리뽑고 행위적발 시 최고 과징금을 부과하는 등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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