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김영욱시사칼럼니스트] 1995년 12월 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골목.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검정색 코트와 흰색 머플러를 두른 채 10여명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자택 앞에서 이른바 ‘골목길 성명’을 발표했다.

▲ 그래픽_뉴스워커 황성환 그래픽 1담당

전씨는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으로 보여 저는 검찰의 소환요구 등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짧지만 비장한 모습을 보였지만 세간의 조롱을 받았다.

필자도 당시 사회부 사건기자로 이날 연희동 골목 현장에서 ‘유명세’를 탄 망언을 취재했는데 날씨가 무척 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했는가. 그로부터 24년이 흐른 새해 벽두에 이번에는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가 “남편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망언을 해 공분을 사고 있다.

이씨는 1일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전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단임제를 이뤘다. 한국 민주주의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막말했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궤변이자 망언이다. 대통령 단임제는 군사독재에 반발한 시민들의 희생과 저항을 통해 쟁취한 6월 항쟁의 열매이자 민주주의의 결실이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 난 사실을 자신들의 공으로 돌리는 뻔뻔함에 할 말을 잊게 된다.

이씨는 지난해 3월 출간한 자서전에서 “우리 내외도 5·18의 억울한 희생자”라는 황당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전씨도 한 달 뒤 나온 회고록에서 같은 주장을 했다.

오죽했으면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씨의 논리대로라면 민주주의의 할아버지는 박정희, 박근혜는 누나냐”라고 반문한 대목에 쓴웃음마저 나온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학살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되는 마당에 역사와 피해자 앞에 사죄하고, 참회의 삶을 살지는 못할망정 이처럼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일방적인 주장을 일삼는 행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씨의 발언은 7일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 불출석을 예고했다. 하지만 사법적 심판의 영역인 재판을 정치적 도구화하려는 것은 동기의 불순함은 물론 피해자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그릇된 행태다.

전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故)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비방하고 ‘성직자가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등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그동안 수차례 재판에 불출석했다.

‘관할 이전’ 신청을 내며 재판을 지연시키더니 노인성 치매(알츠하이머병)를 이유로 재판을 못 받겠다고 한다. 이날 재판 불출석에는 ‘독감에 결려서’라는 핑계도 더해졌다.

얼마 전까지 회고록을 출간하고 모교 체육대회 등에 모습을 드러낸 그가 정말 재판에 못 나올 정도인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5·18 관련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것 같아 많은 이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재판부는 전씨가 특별한 이유 없이 법정에 나오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에 대해 구인장을 발부해야 한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으면 재판부는 구인장을 발부해 강제 구인할 수 있다.

전씨 부부의 주장대로 “5·18의 억울한 희생자”이자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면 떳떳하게 재판에 나서는 게 옳다. 재판에 성실히 임해 죗값을 치러야 한다. 전씨의 치매 여부도 법정에서 가리면 될 일이다.

전씨는 더 늦기 전에 광주 영령들 앞에 무릎 꿇고 ‘백배사죄(百拜謝罪)’해야 한다. 그 길만이 광주 영령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달래는 길이다.

전씨 부부는 지금처럼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감추려 든다면 역사의 단죄를 피할 길 없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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