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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죄가 있는 것은 무궁화가 아니라 우리 후손들의 무지와 무관심이다
염정민 기자  |  2580@newswork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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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26  11: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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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_진우현 뉴스워커 그래픽 2담당 기자

[오피니언] 최근 난데없이 무궁화가 대한민국의 국화(國花)로서의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원예학이나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논란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무궁화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관계로 일각에서 제기되는 무궁화는 국화자격이 없다는 주장에 진짜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충격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궁화는 대한민국의 국화로서 자격이 충분하다.

아니 나중에 언급할 남궁억, 우호익 선생과 같은 독립투사들이 일제의 탄압에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끝까지 무궁화를 수호한 역사를 알게 된다면 내가 무궁화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던 것 자체만으로도 선조 독립투사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결국 최근에 논란이 된 무궁화의 국화자격 논란은 무궁화가 문제가 아니라 무궁화에 대해서 지식을 갖추지도 않았고 관심마저 주지 않았던 우리들 스스로가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무궁화가 대한민국의 국화로 자격이 없다는 측은 구한말(舊韓末) 지리서가 아닌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설화를 근거로 한민족에게 생소하며 역사에 잘 언급되지도 않는 무궁화를 한국의 국화로 급조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처음 접했을 때 역사학, 원예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무궁화가 과연 그런 빈약한 근거를 토대로 대한민국의 국화가 되었나는 의구심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의 조사, 정말 조금의 조사만 해도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한국 역사 기록에서 자주 언급되는 무궁화

무궁화의 어원에 관해서는 다툼이 있지만 무궁화는 과거 근화, 목근화, 헌화초 등으로 불렸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정치가이며 문장가인 최치원의 문집인 ‘최문창후문집(崔文昌候文集)’ 제 1권에는 신라 효공왕의 명을 받아 당나라 광종에게 보내는 국서인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의 초안이 있다.

이 초안에서 최치원은 “근화국(무궁화나라)는 염양한데 점점 쇠약해지고 있지만 고시국(발해)은 강포한데도 더욱 강해지고 있다(槿花鄕廉讓自沈楛矢國毒痛愈盛).”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최치원은 당시 당나라와의 공식 외교문서에서 자신의 나라인 통일신라를 근화국, 무궁화나라로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구당서(舊唐書) 199권 신라전(新羅傳) 737년(성덕왕 36년) 기사에서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槿花鄕),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효공왕 원년(897년) 최치원이 국서를 작성하기 이전부터 신라는 스스로를 무궁화 나라라고 칭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로 오면 근화, 목근화가 아닌 무궁화란 단어가 직접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14의 고율시(古律詩) 가운데 “장노 문공과 동고자(東皐子) 박환고가 각기 근화(槿花)의 이름을 두고 논하는데 한사람은 무궁화는 곧 무궁(無窮)의 뜻이니 꽃이 끝없이 피고 짐을 뜻함이라 하였고 또 한 사람은 무궁은 곧 무궁(無宮)이니 옛날 어떤 임금이 이 꽃을 사랑하여 온 궁중(六宮)이 무색해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논쟁을 벌이는 내용이 나온다.

이 외에도 강희안의 ‘양화소록’, 최세진의 ‘사성통해’, 서유구의 ‘임원경제’에도 무궁화가 언급되고 있어 산해경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많은 정통 역사서와 과거 기록에서 무궁화를 언급하고 있으며, 신라 때 외교문서인 국서에서 공식적으로 언급되는 것 외에 고려 때 무궁화의 어원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한민족에게 생소한 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일제의 탄압과 무궁화 보존

일본 일각에서는 무궁화가 대중화된 일본을 본 떠 무궁화를 한국의 국화로 급조했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정말 동의하기 쉽지 않은 주장이며 개인적으로는 이런 주장을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왜곡된 주장으로 평가한다.

일본은 일본 제국이 조선을 합병했던 기간 동안 무궁화 사용을 탄압했으며 남궁억, 우호익 선생 등은 이와 같은 탄압에 항거하여 목숨을 걸고 무궁화를 지킨바 있다. 이런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을 본 따 무궁화를 한국의 국화로 급조했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사실에서 한참 벗어나 있으며 선조 독립 운동가들의 명예마저 실추시키는 망언 수준의 주장으로 볼 수 있다.

일제의 무궁화 탄압 사례로 조선의 민간에 무궁화를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선다고 하여 ‘눈에 피 꽃’,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부스럼이 핀다는 ‘부스럼 꽃’이라고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행위가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실소를 금치 못할 수준으로 유치하다.

또한 무궁화는 진딧물이 많이 끼는 식물로 폄하되기도 했는데 이는 아욱과 식물의 특징으로 일본 왕실의 꽃으로 사용하고 있는 국화 또한 진딧물이 많이 끼는 식물로 분류되기 때문에 무궁화를 폄하하면 일본 왕실 또한 그 폄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이가 없는 주장이라 볼 수 있다.

한편 1937년 7월 31일 파고다 공원(현 탑골공원)에서는 시국 강연회가 열렸는데 그 안내를 맡은 조선소년군(현 보이스카웃)의 스카프에 새겨진 문양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스카프에는 무궁화로 된 화환 안에 태극마크가 새겨져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문제 삼아 스카프와 교범 등을 압수했으며 간부들을 구금한 것도 모자라 9월 3일 조선소년군을 강제 해산시킨다.

이 외에도 일제는 1938년 2월 3일자부터 무궁화와 한반도를 바탕으로 한 동아일보의 제호를 검열하여 삭제하였으며, 1939년에는 “흰 뫼와 한가람은 무궁화복판‘이라는 문구를 문제 삼아 중앙학교의 교가 사용을 금지시켰고 무궁화가 포함된 교포 또한 월계관으로 바꾸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일제의 무궁화 탄압은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동산에 대한 탄압’사건을 언급할 수 있다.

1918년 남궁억 선생은 강원도 홍천에 학교와 무궁화 묘포를 세워 실습시간에 학생들에게 무궁화의 의미, 국가관을 고취시키는데 활용했다. 무궁화 보급 확대에 힘쓰던 선생은 일제가 무궁화 보급을 금지시키자 무궁화 묘목과 구별이 어려운 뽕나무 묘목을 섞어 보급하는 방식으로 일제의 견제를 우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선생을 의심해오던 일제는 밀정을 잠입시켜 선생의 굳건한 독립 사상을 확인했다.

이때 남궁억 선생은 “사쿠라(벚꽃, 일본의 상징)는 활짝 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계속 피어나는 것처럼 한국의 역사도 영원할 것.”이라는 말로 일제에 의해 핍박받고 있지만 언젠가는 한민족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으로 믿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독립의지를 확인한 일제는 남궁억 선생을 구금했으며 무궁화를 전부 없애라는 긴급지시를 내려 7만 주에 달하는 무궁화 묘목을 불태웠다. 이 사건으로 남궁억 선생은 1년 징역과 3년 집행유예의 형을 선고받아 형기를 다 채우고 출소했지만 옥중에서 행해진 고문의 영향으로 1939년 4월 77세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의 보급을 통해 민족의식의 고취와 독립 사상을 강화했다면 우호익 선생은 학술적인 논문을 통해 무궁화와 한민족의 관계를 밝히는데 힘썼다.

1927년 우호익 선생은 조선사상통신사가 간행했던 ‘조선급 조선민족’에 ‘무궁화고(無窮花考)’라는 학술논문을 게재했는데, 무궁화고에는 무궁화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 문학상에 나타난 무궁화, 식물상에 나타난 무궁화, 국화(國花)로서의 무궁화에 관한 내용이 과거 문헌을 기초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후 무궁화고는 국문으로 1927년 동광(東光)지 제13호, 제15호에 세분화되어 상편과 중편이 재차 연재되었지만 하편은 1927년 8월 동광지가 제16호로 휴간되어 미완성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1928년 청년(靑年)지 제6호, 제7호에 무궁화예찬(無窮花禮讚)이란 제목으로 무궁화고 하편의 내용이 실리게 되면서 완전한 무궁화고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즉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무궁화를 보존하려한 남궁억, 우호익 선생과 같은 독립 운동가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무궁화가 일본의 본을 따라 한국의 국화로 급조됐다는 주장을 늘어놓는 것은 사실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20년 넘게 한국에서 산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의 저서 ‘풍류한국(1965, 신태양사)’에서 프랑스, 영국, 중국 등 대부분의 나라가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을 상징하던 꽃을 국화로 선정했지만, 드물게도 한국이 조선 왕실의 오얏꽃이 아닌 조선 민중의 꽃인 무궁화를 국화로 선정한 것은 인상적이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궁화는 일제의 탄압에서도 꺾이지 않는 민중의 정신적 지주로 작용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무궁화의 국화 자격 논란은 무궁화가 대한민국의 국화가 될 자격이 있음을 논하는 자리라기보다는 후손인 우리들이 무궁화가 과거 우리의 선조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한 결과 발생한 무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무궁화의 국화 자격을 논하기 이전에 무궁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하며 관련 사항들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한다.

논란이 벌어지기 전까지 무궁화에 조금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1인으로서 조사를 거듭할수록 목숨을 걸고 무궁화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려했던 선조들의 비장한 자세에 숙연해지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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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숙
정말 올바른 답변입니다. 무궁화연구회 교수들도 함부로 답변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 국민들이 무궁화를 올바로 키우고 관리하는 자세가 필요하군요 기사를 쓰신분과 통화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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