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우현 뉴스워커 그래픽 2담당 기자

[뉴스워커_오피니언] 무궁화의 국화 자격을 반대하는 쪽 일부는 구한말, 즉 대한제국 시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국민들에게 생소한 무궁화를 국화로 급조했기 때문에 무궁화는 국화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신라를 근화향(무궁화나라)이라고 직접 표현한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무궁화는 구한말 훨씬 이전부터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다.

1152년에 출생하여 1220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고려시대 문신 이인로가 창작한 과어양(過漁陽)이라는 7언 율시에는 “槿花低映碧山峯(무궁화는 아직히 푸른 산봉우리에 비치는데)”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 고전문학 분야에서 무궁화가 언급되는 것은 과어양 뿐만이 아니다.

1420년에 출생하여 1488년에 사망한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이 만든 ‘사가집 제5권’에는 ‘일휴(日休)가 부쳐 온 시에 차운하다.’의 제목으로 시 3수가 실려 있다. 그 중 마지막 수에 “紅槿花開柳映門(무궁화 붉게 피고 버들가지 문에 비치고).”란 구절에서 무궁화가 언급된다.

한편 1649년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김성일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지는 ‘학봉집(鶴峰集) 학봉일고 제2권’에서 무궁화는 언급되는 수준에서 탈피하여 직접 시조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본문은 아래와 같다.

“名花百日又無窮(좋은 꽃 백 일 피고 또다시 무궁하여)/ 脈脈西墻相倚紅(끊임없이 서쪽 담서 붉게 꽃을 피우누나)/ 客來亦有無邊趣(객이 와서 또한 역시 가없는 흥 있나니)/ 萬化誰探無極翁(만물 중에 그 누가 무극옹을 찾아보나).”이라는 시로 백일 동안 피고지고 다시 피는 무궁화를 노래하고 있다.

이 외에도 다수의 문학 작품에서 무궁화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무궁화가 생소한 꽃이며 과거 한반도에서 보기 어려웠다는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울타리로 만들었을 정도로 한반도에서 흔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궁화

오히려 무궁화가 한반도에서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의 귀한 식물이었다면 과연 집을 둘러싸는 울타리의 재료로 무궁화를 사용했을까?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지만 고전문헌 곳곳에서 무궁화를 울타리로 썼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글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과거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식물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1328년에 출생하여 1396년 사망했고 정몽주의 스승이기도 했던 고려 후기의 문신 목은(牧隱) 이색의 문집 목은시고 제5권에 수록된 시에는 “槿作藩籬竹作椽(무궁화로 울 만들고 대로 서까래 만들었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옥에서 서까래란 지붕의 뼈대를 이루는 나무를 의미하는데 대나무로 서까래를 만들었다면 고급 주택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시에서 이색은 급조 혹은 제대로 된 구조물을 만들지 않았다는 추정이 가능하고 이 구조물의 울타리로 무궁화를 택했다는 것은 무궁화가 값싸고 흔한 재료라고 추정하는 것에 비약은 없다고 생각한다.

무궁화를 울타리의 재료로 썼다는 것은 목은 시고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1400년대에 쓰인 서거정의 ‘사가집 제3권’ 중 ‘池上晩步(석양에 못을 거닐다).’라는 시에서는 “籬下槿花開落盡(울타리 밑의 무궁화는 피었다 다 졌는데).”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시에서의 무궁화도 울타리에 존재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적이 있는 학봉집에서도 “脈脈西墻相倚紅(끊임없이 서쪽 담서 붉게 꽃을 피우누나).”라는 구절로 무궁화가 울타리를 만드는 재료 혹은 울타리에서 피어나는 꽃으로 묘사되고 있다.

흙담에 기와를 얹지 않고 식물로 만든 울타리는 양반 등 지배계층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무궁화가 울타리로 쓰인 것으로 나오는 것은 무궁화가 짚신을 삼는 지푸라기만큼이나 당시 민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갔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주장대로 무궁화가 순수 한글 어원이라면 관련 논쟁 무의미

한편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중국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명칭인 근화 외에 한반도에서의 독자적인 명칭 무궁화가 언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어원에 다툼이 있지만 김정상의 논문 ‘무궁화보(無窮花譜)’에 의하면 1923년 전남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에서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무궁화를 ‘무우게’로 부른다고 보고하였다.

김정상의 주장대로 순수 한글이름으로 보이는 ‘무우게’에서 무궁화가 나왔다면 한반도에서 무궁화가 흔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 논쟁을 지속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무우게라는 순수 한글이름이 어원이라면 지식계층보다는 생활 속의 필요에 의해서 민중들이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민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정상의 주장이 유력하게 평가받고 있는 근거로는 일본에서 무궁화를 무쿠게(牟久計), 모쿠게아사가오(牟久計朝顔), 하치스, 기하치스 등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특히 이중 무쿠게의 경우 무궁화와 뜻으로는 연결되지 않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무궁화가 전래될 때 ‘무우게’에서 음이 변형된 무쿠게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낳고 있다.

즉 최치원의 문집인 고운집에 나오는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신라를 무궁화나라라고 직접적인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 문헌에서 무궁화가 한반도에서 희귀한 식물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은 많이 찾을 수 있다.

조선 시기에 제작된 역사서인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의 언급을 제외해도 한반도에서 무궁화가 많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무궁화의 국화 자격 논쟁 자체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인 이상 자신의 주장을 자유롭게 펴고 또 그에 대한 반론을 함으로서 발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건설적인 방향으로 흐른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무궁화가 생소했고 더 나아가 일본을 본받기 위해 무궁화를 국화로 선정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문헌을 볼 때 한반도에서 무궁화가 흔했고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동산 사건에서 보듯이 무궁화는 일제에 항거하는 하나의 수단 혹은 정신적 지주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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