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의 관심이 없어서이지 선조들 무궁화 홀대하지 않아

▲ 그래픽-뉴스워커 황성환 그래픽 1담당

 조금만 찾아봐도 쉽게 찾아지는 한국 고전 문학 속 무궁화

최근 한 언론의 기고문에서 무궁화를 언급하는 고려시대 문인이 최충, 이인로, 이규보, 이제현 4인 뿐이며 조선시대 문인은 서거정, 유몽인, 윤선도, 김려, 정약용, 송옹 6인 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며 한반도에서 무궁화에 대한 언급이 거의 전무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국에는 한국고전을 번역하는 ‘한국고전번역원’이라는 기관이 있는데 한문을 잘 모르는 필자가 이번 조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한국고전번역원이 구축해놓은 ‘한국고전종합DB(데이터베이스)’는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필자는 무궁화의 한문 이름 중 하나인 ‘槿花’로만 한국고전종합DB를 검색했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에 한국고전종합DB에서 槿花로 검색한 내용이 링크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는 일반 국민들은 한국고전문학에서 무궁화(槿花)가 언급되는 것이 적지 않음을 직접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편 한국고전번역원이 역대의 한국고전문학을 전부 DB화 시키지는 못했으며 예산, 인원 문제 등으로 DB화된 원문 전부를 번역하지는 못한 한계가 존재하고 필자 또한 근화라는 단어로만 검색한 것을 감안한다면 향후 한국 고전문헌에서 무궁화 언급이 훨씬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미리 언급해두기로 하며 일각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로 한다. 

먼저 고려시대 최충을 포함한 4인의 문인만이 무궁화를 언급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고려후기 문신인 조준(1346~1405)의 ‘송당문집 제1권’에 있는 ‘題星洞松亭(성동 송정을 두고 짓다)’라는 시에서 “오동꽃 다 지고 무궁화 꽃 피는데 / 桐花落盡槿花開” 표현이 나와 무궁화의 언급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328년에 출생하여 1396년 사망했고 정몽주의 스승이기도 했던 고려 후기의 문신 목은(牧隱) 이색의 문집 목은시고 제5권에 수록된 시에는 “무궁화로 울 만들고 대로 서까래 만들었네/ 槿作藩籬竹作椽”라는 구절이 나와 무궁화가 언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무궁화 논쟁에 대해서 한시를 차운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는데 이는 본문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에 기인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전종합DB에 수록된 동국이상국집의 원문과 번역문을 비교하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에 보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원문에서 자신의 친구들이 무궁화의 어원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토론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을 포함한 한자 문화권에서는 무궁화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근화, 목근, 목근화 등의 명칭을 쓰고 있기 때문에, 한시의 운을 빌려서(차운하여) 쓴 시조에 의미가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차운이란 그저 시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 단어를 몇 개 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내용 전체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사건이 중국의 사건을 인용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시대로 오면 더욱 무궁화의 언급이 많아지는 것을 DB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기고문의 주장에서 나오는 서거정을 포함한 6인을 제외해도 적지 않은 무궁화 언급이 있음이 확인된다.

일단 조선 초기 문신인 성현(成俔 1439~1504)의 ‘허백당집’에 수록되어 있는 ‘유소사(有所思)’라는 시조에 “동산의 무궁화꽃 꽃망울을 터뜨리고 / 園中槿花吐紅萼”라는 표현으로 무궁화의 언급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문서’에 수록되어 있는 ‘소천시(筱川詩)’라는 시조에 “무궁화꽃 옆에 사립문 닫혔네 / 朱槿花前掩竹扉”라는 표현이 나와 무궁화가 언급이 되었음을 확인 가능하다.

결정적으로 한반도에서는 무궁화를 직접 대상으로 하는 시조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닌 주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기의 김성일(1538~1593년)이 지은 ‘학봉전집’에는 무궁화를 직접 노래한 시가 존재하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좋은 꽃 백 일 피고 또다시 무궁하여 / 名花百日又無窮
끊임없이 서쪽 담서 붉게 꽃을 피우누나 / 脈脈西墻相倚紅
객이 와서 또한 역시 가없는 흥 있나니 / 客來亦有無邊趣
만물 중에 그 누가 무극옹을 찾아보나 / 萬化誰探無極翁

이 외에도 조선 중기 이유태(1607∼1684)가 지은 ‘초려집’을 비롯하여 안정복(1712~1791)의 ‘순암집’ 등 많은 문헌에서도 무궁화의 언급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기고문에서 주장하는 대로 한국의 고전문헌에서 고려시대에 4인, 조선시대에 6인만이 무궁화를 언급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산, 인원 등의 문제로 DB 구축과 번역이 100% 완성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DB로 한국고전문학에서 무궁화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에 제약은 존재하였지만, 전공분야가 아닌 고전문학 분야에 대한 조사에서 한국고전번역원 DB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도움을 준 것에 대해 한국고전문학을 번역해왔던 관계자들에게 국민의 1인으로서 감사를 표한다.

DB가 없었다면 무궁화 논쟁에 관련한 잘못된 주장에 반론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들도 다른 한국고전문학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해당 DB를 이용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한국 고전문학분야 관련한 잘못된 주장에 반론하기 위해서라도 해당 번역 사업은 꾸준히 지속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학 외 아동 학습서 등에도 나오는 무궁화

일각에서 무궁화는 한반도에서 아주 생소한 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또한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중종 22년, 1527년에 최세진은 아동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를 편찬했다. 이 훈몽자회는 천자문 등의 기존 아동용 한자 학습서에 중국의 고사와 추상적인 내용이 많아 아이들이 배우기 어려웠던 것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지만 훈몽자회는 아이들의 교육도를 높이기 위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가리키는 한자를 모아 쉬운 한글로 풀이했다.

즉 훈몽자회는 추상적이거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물체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이는 한자들을 한글로 풀이했다.

그런데 이 훈몽자회 상권의 화품(花品) 단락에는 ‘槿 무구ᇰ화 근’과 ‘蕣 무구ᇰ화 순’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일각의 주장처럼 무궁화가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꽃이라면 왜 아동용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에 무궁화가 언급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아동용 학습서에 아이가 이해하기 힘들거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AI, 인플레이션, 철갑상어의 캐비어 같은 단어를 수록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허준(1539~1615)의 동의보감은 중국의 약재와 조선의 약재가 달라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조선 국민들에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재로 병을 치유하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유명하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감을 잡았겠지만 이 동의보감에 무궁화를 이용한 치료법이 언급되어 있다. 동의보감에는 “무궁화의 약성은 순하고 독이 없으며 장풍과 사혈을 멎게 하고 설사한 후 갈증이 심할 때 달여 마시면 효과가 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다른 내용도 존재한다.

게다가 의학서인 동의보감 외에 한국 고전 원예서인 산림경제 등에서 재배 방법 등을 소개하기도 하고 있으므로 무궁화가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식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동의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발해도 무궁화에 대한 좋은 언급이 있어

한편 조사를 진행하던 중에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최치원이 신라를 무궁화의 나라라고 표현하여 신라만 무궁화를 좋은 의미로 언급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부족한 생각은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의 자료에 의해 무참히 깨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중국 길림성에 있는 발해 제 3대왕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737~777)의 묘비에는 “(정혜공주는) 궁궐의 모범이 되었고 동궁의 누나가 되었으니 옥 같은 얼굴은 무궁화(蕣華)만이 비길 수 있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묘비에는 순화(蕣華)라는 한문이 쓰여 있지만 순화는 무궁화를 뜻하는 단어이며 앞서 언급한 아동용 학습서 ‘훈몽자회’에도 무궁화 순이 언급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발해는 왕족인 정혜공주의 얼굴은 무궁화만이 비교될 수 있다고 극찬했다고 볼 수 있고 이는 신라 뿐 아니라 발해 또한 무궁화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력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무궁화는 고전문헌에 자주 언급되며, 아동용 학습서와 의학서, 원예서에까지 두루 언급되고 심지어 발해 왕족의 묘비에서까지 언급이 되고 있기 때문에 선조들이 무궁화를 홀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고전문헌과 같은 고전 자료가 잘 알려지지 않아 후손들이 잘 모를 뿐이지 무궁화가 한반도에서 생소한 꽃이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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