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국제정세]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촉발된 한․일 간의 갈등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12일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양국 무역실무 당국자 회의 후 오히려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오히려 일본 측은 우리나라를 안보상 우호 국가인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또한 한때 한일 간의 갈등에 중재의 뜻을 드러낸 미국도 섣불리 개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상 사태가 장기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청와대는 분석하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대법원 징용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조치가 장기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래픽_황성환 뉴스워커 그래픽 1담당>

◆ 일본 측의 억지로 끝난 한․일 양자협의

일본의 경제보복 이후 한․일 간의 첫 접촉이 지난 12일에 있었다. 양국의 과장급 첫 실무회의인데 한마디로 동상이몽의 자리였다. 한국은 문제해결 의지를 갖고 출석한 것이고, 일본 측은 그저 형식적 출석일 뿐이었다. 회의 내내 일본 측은 핵심질문에 명확하게 답변하기보다 두루뭉술하게 답변하고 끝낸 것이다. 즉, 수출 규제를 하는 이유와 관련해 “부적절한 사인이 발생했다”고 하면서도 근거를 들지 못했으며, 보안 논리와 관련해 “북한을 비롯한 제3국으로 (전략물자가) 수출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서 일본 측이 이유로 들었던 ‘대북 논리’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일본 기업의 한국 수출에 법령 준수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강제징용 관련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무역관리를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과 관련해 우리 대표단이 둘의 연관성을 묻는 질문에도 일본 측은 답변하지 못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양자 협의 후 브리핑에서 일본은 “한국 측으로부터 (규제강화의) 철회 를 요구하는 발언은 없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우리 대표단이었던 산업통상자원부의 전찬수 무역안보과장․한철희 동북 통상과장은 이튿날인 13일 오전 11시쯤 하네다 공항에서 서울로 떠나기 직전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측의 발표 내용을 6개 항목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반박했다. 일본 측의 한국 수출 규제 조치에 유감 표명을 했고, 조치의 원상회복, 즉 철회 요청을 분명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자 일본 경제산업성은 우리의 반박 후 6시간 만에 기자회견을 열고 “문제 제기는 있었지만 회의록을 확인해 보니 ‘철회’라는 말은 없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이렇게 말장난 같은 진실공방이 이어지는 모습을 통해 한일 간의 갈등이 조기에 매듭짓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을 하게 한다.

◆ 국제적 공론화 잰걸음, 미국은 머뭇

한일 양자협의가 신통치 않은 결과를 가져온 가운데 오는 23일부터 이틀 동안 열리는 WTO 일반 이사회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가 디뤄진다. 우리나라가 의제 상정을 요청해 다뤄지게 된 것인데 164개 회원국 대사가 참석하게 된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였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부품 소재 부족으로 인한 생산 차질이 전 세계 공급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고, 이는 전 세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한편 한일 간의 갈등에 중재 의견을 표명했던 미국은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있다. 모건 오테이거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11일(이하 현지시간) 브리핑에서 중재의 뜻을 비쳤지만 11일부터 일본을 방문 중인 스틸웰 미 국무 차관보나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들은 직접적인 중재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한일 간의 갈등으로 인해 미국 기업의 피해가 가시화될 때 움직일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해리스 대사도 “한일 당사국들이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모든 옵션이 수포가 되고, 미국 기업과 안보에 영향을 끼칠 때 미국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창원 노무라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은 “D램 가격이 오르면 전 세계적으로 불편해지는 회사와 나라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속적으로 급락하던 D램 가격이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이후 반등하여 한 주만에 13%나 급등하면서 글로벌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 장기화 가능성 커져...정부 대비 나서

한일 양자 실무자회의에서 일본의 태도가 보여줬듯이 일본은 이번 수출규제를 쉽게 풀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려는 의도까지 보이면서 이번 사태가 장기화 될 가능성이 커졌다.

외신들도 장기화를 우려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다. 정보기술(IT) 전문매체 테크크런치는 13일 한일 무역갈등을 소개하면서 “또다른 무역쟁이 발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양국 간 무역분쟁이 장기화되면 삼성전자의 메모리, 디스플레이 및 차세대 반도체칩 공급망이 크게 손상될 것이다. 일본 공급체들도 타격을 입을 것”이라며 “이는 스마트폰, 컴퓨터 등 수많은 전자제품 공급망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백색국가에서 제외되면 1천100개 품목이 영향을 받을 수 있어 대일 의존도가 높은 조업 분야의 타격이 매우 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삼성전자 등 각 기업들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계획 마련에 들어갔다.

우리 정부도 장기전 대비에 나섰다. 청와대 관계자는 14일 “일본이 처음에는 강제노역을 꺼냈다가 대북 제재로 이동하는 등 무역보복 조치를 장기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정부는 자동차와 정밀화 등 다른 산업계의 상황을 세부 점검하고 있고, 일본이 타깃으로 삼을 만한 100대 품목을 따로 추려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정부 여당은 추경예산 증액을 수출규제 3대 품목에 한정하지 않고 추가 규제가 예상되는 품목들에 대해 기술개발․상용화․양산단계 지원 예산을 포함하기로 했다. 또 대일의존도 상위 50개 과제에 대한 소재․부품․R&D 예산도 반영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정부 대비가 일본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을 막아낼 강력한 방패가 될 수 있을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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