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시사의 창] DHC 방송 등에서 드러난 일본 극우의 실체
[뉴스워커_시사의 창] DHC 방송 등에서 드러난 일본 극우의 실체
  • 염정민 기자
  • 승인 2019.08.16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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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을 반성하지 않은 일본 극우에 대한 감시와 견제 필요
▲ 황성환 뉴스워커 그래픽 1담당

[뉴스워커_시사의 창] 하쿠타 나오키(百田尚樹) 작가는 지난 8월 13일 DHC 방송에 출연하여 “일본인이 한글을 통일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쿠타는 방송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1912년 조선총독부가 ‘보통학교용언문철자법’을 공표했던 사실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한글 사용을 탄압했던 일본이 한글을 통일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발표 이전에 이미 한글 철자법은 1446년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반포된 이후 500년 가까이 관습적으로 그 원형이 대부분 확립되어 있었으며 1907년에는 대한제국 학부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어 1909년에는 주시경 선생 등의 ‘국문연구의정안’이 발표되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총독부의 보통학교용언문철자법 작성에도 친일인사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지만 어윤적, 현은 등의 조선인 위원이 주도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일본인이 한글을 통일했다는 발언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특히 한글사용을 금지하고 탄압했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고려한다면 이렇게까지 설득력 없는 주장을 해야 하는 하쿠타가 조금은 측은해지기까지 한다.

물론 1938년 한글 사용을 본격적으로 금지하기 전에도 일제는 공표된 1911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조선어를 제외한 모든 교과서는 일본어로 발행하고 모든 공적인 문서를 일본어로 작성하게 하는 등 한글 사용을 억제하고 일본어 보급을 장려했다.

오히려 한글 통일을 일본인이 했다는 하쿠타의 주장과는 반대로 한글 보급은 조선총독부가 아닌 조선인 민간을 중심으로 널리 행해졌다.

이와 관련하려 1929년 신간회와 조선일보를 주축으로 안재홍, 조만식 선생 등이 한글 강좌를 개최하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려고 하는 등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여 당시 문맹률이 90%에 달했던 조선인을 계몽하고자했다.

또한 장지영, 최현배, 이극로 선생 등이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시작했던 ‘조선어학회’가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하는데 바로 이 통일안이 현재까지도 한글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일제는 1938년 3월 15일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기 시작했으며 1940년에는 우리말 신문을 강제 폐간했고 1942년에는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려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하여 30명 이상이 구속되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단지 한글 사전을 편찬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내란죄를 적용할 정도로 강하게 탄압한 일제가 한국 국민들에 통일된 한글을 보급했다는 하쿠다의 주장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난징대학살도 날조된 사건이다?

NHK 경영위원이기도 한 하쿠타는 지난 2014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 후보의 지원연설에서 “난징대학살은 장제스가 멋대로 선전한 것이며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뒤 1938년 2월까지 민간인 대학살, 강간, 방화 등을 일으킨 사건을 의미하며 국제 사회에서는 수십만의 학살 피해자와 수만의 강간피해자가 발생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난징대학살 동안 독일 나치 당원이자 지멘스 직원이었던 ‘존 라베(John Rabe)’와 프랑스 예수회 출신인 로베르 자퀴노(Robert Jacquinot) 신부는 안전구역을 만들어 일본군의 학살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민간인 대량 학살과 강간 범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6년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재판에서는 학살 피해자를 15만 명 정도로 추산했으며 국제적십자사 등의 국제 구호단체들은 약 19만 8천여구의 시신들을 수습했다고 밝히는 등 국제사회는 일본군에 의해서 행해졌던 난징대학살을 인정하고 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당시 일본 언론 또한 난징대학살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쿠타를 비롯한 일본 극우들은 난징대학살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과 1937년 12월 13일자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누가 먼저 100인을 일본도로 참수시키는지 내기를 했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 기사를 증거로 두 범죄자는 전범으로 확정되어 사형 당했다.

이와 같이 충분한 증거가 있으며 많은 국제사회가 인정하고 있지만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난징대학살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 없는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침략 전쟁 자체에 대한 반성도 보이지 않아

하쿠타는 ‘영원의 제로’라는 소설을 집필하여 일본 내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동시에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 없이 카미카제 공격을 미화한다는 비판 또한 만만치 않게 받은 인물이다.

하쿠타는 스스로 전쟁을 긍정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부정했지만 그의 작품을 기반으로 하여 2013년에 제작된 동명의 영화 ‘영원의 제로’에 대해 일본을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영화는 태평양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로 미국의 공격에 대해 목숨을 걸고 일본을 지키는 일본 전투기 조종사의 일생을 묘사하는 것에 집중한다.

즉 1941년 12월 7일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함으로써 시작되었던 태평양 전쟁의 본질은 사라지고, 어느새 전세를 역전시킨 미국의 반격에 대해서 방어적인 성격만을 부각하는 묘사를 잔뜩 해놓은 영화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영화는 애초에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무시한 채 목숨을 내걸고 나라를 지키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흥미진진한 영웅 서사극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하쿠타의 가치관은 중일전쟁이나 한일강제합방에 내포되어있는 침략성도 부정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와 같은 가치관은 미국의 힘에 굴복한 사실만 인정할 뿐이지 침공이나 침략의 부당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강제합병,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서 침공이나 침략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국력이 주위 나라보다 강해졌을 때 언제든지 침공이나 침략을 강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쿠타는 말로는 전쟁을 긍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가치관이 과거 일본이 행했던 침략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에 행해진 침략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의 주장은 그저 근거 없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은 국제적 공통인식에서 벗어나 있는 극우들이 일본의 정책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이웃국가들의 감시와 견제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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