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사회복지사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선생님을 만나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팠던 나의 응어리가 풀어졌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민망할 정도로 깊은 감사의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오늘도 웃는다.
오늘의 웃음은 오랜 시간 동안 내 것이 아니었다. 나의 웃음을 다시 찾기까지는 잊혀 지지 않는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세월의 쓴 약을 함께 먹으며 견뎌왔던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산재보험이라는 사회안전망의 역할이 컸음을 고백한다.

“자! 김 기사, 그 쪽 모서리 약 10cm 정도의 깊이로 마무리하면 되겠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순간 온몸이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아픔 때문에 미동도 할 수 없었다.

1995년 9월 2일 오후 3시 30분, 울산상호신용금고 신축공사 현장의 지하터파기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즈음, 지하 바닥의 잔토를 담아 덤프트럭에 상차하고 내려오던 크레인의 버켓에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협착 되어 인생의 꿈을 향해 달려가던 내 소중한 시계바늘은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구급차를 타고 백천병원으로 갔으나 흉추12번과 요추1번 압박골절과 늑골골절로 인한 장 파열이 생겨 지체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급히 부산백병원으로 이송돼 사고의 충격으로 골절된 늑골조각에 의해 파열된 장기 일부는 절제하고 봉합하는 응급수술을 받았다. 찢기고 터져버린 폐의 기능부전으로 자가 호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마치 고로쇠나무의 수액을 채취하듯 옆구리에 호스를 주렁주렁 꽂아 뱃속의 고인 피와 나쁜 물들을 뽑아내 고비를 넘겼다.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 채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장 파열 수술을 받은 뒤라 척추수술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숨만 쉬며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병실에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의 근원은 알고 보니 욕창으로 인해 엉덩이의 1/3이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살이 썩어 들어가는데 모를 수가 있을까? 나는 순간 썩어가는 시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고일로부터 2주 후 압박 골절된 흉추와 요추부 수술을 받았으나 신경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돼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게 됐다. 삶에 대한 무가치함과 분노와 좌절감 때문에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이상의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절망과 좌절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병상에서 꼼짝도 못하고 그저 누워서 지내야 했던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숨 쉬고 말하는 것 외는 단 하나도 허락된 것 없었기 때문에 그 어떤 선택도 스스로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내 삶의 미래는 소용돌이 속에서 발생했다 순간적으로 사라져가는 물거품이 돼버린 시간들이었다.

건축가로 성공한 나의 모습과, 평생을 사랑하며 불러도 모자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소박하게 만들어가고자 했던 미래의 꿈이 사라져버린 현실 앞에서 더 이상 기대거나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빛은 멀어져만 갔다. 텅 빈 가슴을 파고드는 고독과 상실, 좌절과 분노와 자괴감은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곁에는 아직 ‘가족’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어디에도 마음 두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를 바라보면서 슬픔을 감춘 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도하는 사랑하는 아내와 네 살 된 아들, 이제 갓 5개월 된 딸을 생각하면서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야. 살아야 된다. 가족 앞에서 만큼은 눈물을 보이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현장을 뛰어다니며 태산을 깎고, 늪지를 개간해 기초를 닦고 건물을 지으며 인생을 개척해 온 건강했던 날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침에 왔다가 흩어져버릴 안개와도 같은 막연한 현실 앞에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가족과 함께 다시 한 번 도전해 새로운 삶을 개척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장애를 수용하자고 마음먹고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았다. 서서히 육신의 상처도 아물어 거의 3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새로운 다짐으로 세상의 문턱을 넘어보려 했지만 이 또한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때로는 편견과 차별의 냉대에 넘어지고 좌절하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언제나 아내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조언자로서 나와 동행하며 후견인이 돼줬다.

근로복지공단의 재활프로그램 중에 직업훈련비용지원사업의 문이 열려 있음을 알고 나에게 권유했고, 나는 기꺼이 컴퓨터학원에 등록해 공부하면서 나처럼 산재를 당해 힘들어하는 산재장애인들을 만나게 됐다. 나의 작은 마음이 이분들의 마음을 열어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작은 불씨가 되고자 나를 다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회복지실천현장으로 발을 들이게 됐다.

실제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기사로 현장에만 근무했던 사람이, 사회복지실천기술이 없는 비전문가가 사회복지실천현장에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사회복지전문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근로복지공단의 대학학자금대출을 받아 늦은 나이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사회복지사1급자격증을 취득해 내 생에 제2의 전성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비록 장애로 인해 활동의 폭은 좁지만 사회복지전문가로서, 산재근로자 사회적응프로그램 운영기관의 슈퍼바이저로서, 근로복지공단의 희망 멘토로서,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사회성 향상을 위한 일들을 감당하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오늘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나는 꿈과 희망, 그리고 비전이 있다.
나를 찾는 많은 분은 희망의 다리를 잃었고, 소망의 팔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증오한다. 그리고 좌절하고 삶의 의지를 잃어가고 있다. 나는 이분들의 잃어버린 다리와 팔을 되돌려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분들의 다리와 팔이 돼주기 위해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첫째는 이분들이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심리적인 안정을 찾아주는 일이다. 둘째는 이분들이 사회에서 다시 활동할 수 있도록 남아있는 잔존 기능을 이용한 사회직업재활을 원조하는 일이다. 셋째는 두 번 다시 이분들에게 찾아온 삶의 아픔을 또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경험을 전한다.

나는 아직도 아픔을 겪고 있다.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 온 몸에 수술 자국으로 가득하다. 힘이 들어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남아있는 작은 것을 가지고 세상에 기여하며 살아갈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성경말씀처럼 힘들어 지쳐 쓰러져 갈 때 누군가를 만나 잃어가던 희망을 찾아 삶의 끈을 이어갈 수 있도록 희망의 씨앗, 소망의 그루터기를 다시 한 번 만들어 가겠다며 감사하시던 그 아주머니의 미소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그 순간까지 나는 한 알의 밀알로 살 것이다.

※ 이 작품은 근로자를 위한 신문 뉴스워커에서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의 제공으로 게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뉴스워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