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점세 / 산재보험 수기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탁! 어억. 너무 놀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계 뒤로 떨어진 금형재료를 주우려고 양손을 뻗었을 뿐이다.

내 오른발이 금형기계를 작동시키는 페달 위에 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페달을 밟았다. 순간 나의 양손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나의 양손에는 솜사탕만한 붕대가 감겨있었다.
양쪽 손목이 잘렸다고 한다. 의사선생님은 절단된 왼쪽 손가락 몇 개를 오른쪽 손에 붙여놓았으니 경과를 지켜보자는 말만 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눈치를 봤다.

그래도 붕대를 감고 있을 때는 아직은 내 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결국 붙여뒀던 손가락도 괴사가 되어, 사고가 있고 보름만에 50년 동안 수많은 일을 했던 내 열 손가락이, 내 두 손이 남김없이 사라졌다.
기운도 없고 여기서 내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담당자가 나왔는데 그냥 힘없이 대답만 몇 마디 했다. 담당자는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고, 그렇게 세일병원에서 치료를 했다.

우리 집은 진주에 있고 마누라는 베트남 사람이다. 7살 된 아들과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다. 남들에게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 나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병원에만 있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양손이 절단되고 나니 더 이상 치료할 것도 없는 것 같아서 입원한 지 3개월이 되기도 전에 퇴원해서 집으로 갔다.

형수님이 7살 된 아들을 봐주셨고 부인은 평소처럼 매일 일을 하러 가서 내 옆에 없었다.
내가 우겨서 집에 일찍 오긴 했는데, 나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혼자서는 옷도 못 입고, 내 손으로 시원하게 물 한 잔 마실 수도 없고, 샤워도 시원하게 할 수가 없었다. 밥 한 끼 혼자 먹을 수가 없어서 친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어 집에만 박혀 있었다.
간간히 회사 과장님이 왔다 갔고, 근로복지공단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우울한 하루하루였다.
어느 날 부산에 세일병원에 갈일이 있었는데 부산오시면 꼭 연락 달라는 담당자 말이 기억이 나서 혹시나 하는 맘으로 공단에 전화를 했다.

다치고 난 이후에 아무도 나를 반가워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말 반갑게 전화를 받아줘 기분이 좋았다. 모처럼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며칠 후 나는 핀 빼는 수술이 필요하여 세일병원에 다시 입원을 했다. 그 때도 담당자가 와 줬다. 근로복지공단 부산지역본부와 병원이 무척 가까이 있어서 괜찮다며 자주 찾아와서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회사에 다시 일하게 되면 움직이는 의수도 받을 수 있고, 다른 기관에서도 지원받을 수 있는지 함께 알아보자고 했다. 공단에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양손이 없는 나도 정말 뭔가를 다시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목의 핀 제거를 하고 다시 진주로 가려던 차에 의사선생님이 발가락을 손에 심는 수술을 권유했다. 그렇지 않아도, 손가락이 하나도 없어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무슨 그런 수술이 있나싶어 한참을 설명을 듣고나서, 손가락이 하나라도 생긴다면 당장 수술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단 담당자가 찾아 와서 수술을 정말 원하는 지 두 번이나 더 물어봤다.

“의사선생님과 면담을 해봤는데, 족지전이술은 흔한 수술이 아니에요. 앞전에 괴사가 생겨서 접합한 손가락을 모두 잘라냈었는데, 혹시나 발가락을 이식했다가 그것마저도 성공하지 못하면 선생님은 사지에 장해가 생길 수 있어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태가 될 수도 있는데 정말 이 수술을 원하시는지요.”
정말 원하신다면 자문의사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하자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의사들이 여러 명 모인 회의에 갔다. 손을 보자며 옷을 벗어보라고 했다.

무척 긴장됐다. 이 수술을 못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나는 정말 필요한데… 수술해서 뭐라도 걸칠 수 있는 손가락을 가지고 싶은데…
자문의사회의가 끝나고 며칠 후 수술인정이 됐다. 공단에서 큰 결정을 해줬다. 의사선생님도 고맙고 공단도 고맙고 담당자도 고마웠다.
두 번에 걸쳐 발가락 3개를 옮겨 심었고 두 달이 지났다.

지금은 오른쪽 손가락이 3개나 있다. 엄지부분은 꽤 잘 움직이고, 2, 3번째 손가락은 그냥 찔끔 움직거린다.
그래도 손가락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무척 좋다. 옷이 손가락에 걸린다. 휴대폰 문자는 나 혼자 열어볼 수도 있다.

수술하고 병원에 있는 동안 공단에 담당자가 회사 복직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회사 복귀하고 싶지도 않고 가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공단의 담당자가 내 의지가 중요하다고 몇 번이나 설득을 했다. 내가 회사에 다시 가려는 의지가 없으면 담당인 자기도 회사 가서 할 말이 없다고 했다.

회사에서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라도 찾아보자고 한 후 며칠 뒤에 진주에 회사까지 다녀왔다는 말을 했다. 나 때문에 회사까지 다녀왔다고 하니 나도 회사복귀를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공단의 담당자는 “사장님은 선생님 회사복귀에 대해 좀 부정적인 게 사실이었습니다만, 한 시간정도 면담 끝에 이사님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좋은 대답 드리겠다는 말을 들었어요.” 라고 했다.

내가 회사에 가면 원래 하던 일은 못하겠지만 회사에 쓰레기 줍는 일도 할 수 있고 화분에 물주는 일도 할 수 있다. 자동차 정비일을 오래했었는데, 연습만 하면 운전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무 일도 안하고 집에 있는 것은 상상하기가 싫었다. 남자로 태어나서 일을 안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며칠 전에는 인천에 재활연구소에서 의수를 맞춰주려고 두 명이 왔다. 내가 글을 못 쓰기 때문에 공단담당자가 나대신 신청서를 넣어줬다. 내 손목을 더 절단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전동의수를 지급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세일병원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공단담당자도 항상 근처에 있는 것 같고, 주변에 손가락 다친 친구들도 많아 서로 의지가 된다. 공단담당자는 병원 안에 있을 때는 다 같은 환자라서 상관없지만 사회에 나 혼자 나갔을 때도 양손 절단이 상관없는 것처럼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얘기를 해줬다.

공단담당자가 며칠 전 나보고 산재체험수기를 써보라고 했다. 글 쓰는 재주가 없다고 했더니, 선생님 같은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대~충 적어도 대상감이란다. 하하하, 모처럼 웃었다.

양손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나는 지금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 발가락이 아니 손가락이 3개나 생겨서 기분이 좋고, 담당자가 자주 찾아와서 “손가락에 발톱이 많이 길었네요. 하하. 좀 자주 깍으이소. 털도 좀 깍고요”라고 농담도 걸어주고, 무엇보다 다른 환자들이 나를 보고 희망을 가져서 기분이 좋다.
오늘따라 진주에 있는 내 아들이 무척 보고 싶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꼭 간다고 했는데, 수술을 한다고 가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겠지?

나는 빨리 재활치료까지 마무리하고 움직인다는 의수를 차고 회사도 빨리 출근하고 싶다.
집에만 있는 장애인 아빠가 아니라 장애를 극복하고 열심히 일하는 아빠모습을 아들에게 꼭 보여주리라.
양손이 절단되고 발가락도 몇 개 없는 나, 그렇게 쓰러져 있던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위로와 용기를 전달해 준 김수경 과장님에게 감사하고, 산재치료부터 회사복귀까지 제대로 지원해주는 근로복지공단에게 감사하다. 우리나라 산재보험이 자랑스럽다.

※ 이 작품은 근로자를 위한 신문 뉴스워커에서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의 제공으로 게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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