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람 / 산재보험 수기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그날은 어느 때와 같이 평범하고 평온한 아침으로 시작됐다.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아빠가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같이 아침을 먹을까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차라리 밥을 먹는 시간에 이불 속에서 조금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이 내 몸을 조금 더 지배했다. 누워있을 수 있는 최후의 시간까지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다 정말 출발해야 할 시간이 되고나서야 부랴부랴 교복으로 갈아입고 아빠가 미리 시동을 걸어둔 차로 올라탔다. 아침 이른 시간 피곤함으로 가득 찬 아빠의 차 안에서는 별다른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학교 정문 앞에서 희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아빠의 차가 멈춰 섰고, 나는 “다녀오겠습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차를 빠져나와 학교 안으로 향했다.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수업은 없었고, 바로 자율학습관의 내 자리로 가서 지겨운 문제집을 책상위에 펼쳤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꺼낸 핸드폰에 문자한통이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동생의 문자였는데,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언니 아빠가 사고 당했대.’ 몇 글자 안 되는 문자내용에 등골이 으스스하게 소름이 돋았다. 놀란 마음도 잠시 지난겨울 빙판길에서 충돌사고가 나서 잠시 동안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던 아빠였기에, 이번에도 미미한 교통사고이겠거니 하고 잠시 놀랐던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문제집을 다시 풀기 위해 책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지만,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한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잠시 자율학습관을 빠져나와 화장실로 가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여러 번의 신호음이 울렸지만 받지를 않았다.

몇 번을 거듭하여 전화를 걸어봤지만 통화가 되질 않았고, 결국 포기하고 화장실을 나와 다시 자율학습관으로 향하는 동안 기다리던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엄마의 전화에서는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정말 듣고 싶지 않았던,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빠가 돌아가셨어. 학교 조퇴하고 집으로 와.’ 간간히 울음소리와 섞여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마치 진정이 되질 않고 있는 내 심장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화통화가 끝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크게 울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복도가 내 울음소리로 가득 차도록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친한 친구가 자율학습 감독관 선생님께 나를 데려다줬고, 집에 가는 길이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울며 선생님의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직장동료들과 4인승 트럭을 타고 길을 가던 중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트레일러가 중앙선을 넘어 아빠가 타고 있던 트럭을 덮쳤고, 아빠가 타고 있던 트럭의 4명 중 아빠를 포함한 3명이 죽고, 남은 한 명은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큰 사고였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아빠의 영정사진을 보면 더욱 펑펑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눈물이 잘 나지 않았다. 영정사진 액자 안에 아빠가 웃고 있었지만, 솔직히 잘 믿기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찾아와준 친구들과 어느 때와 같이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었다. 나는 입관식 때 누런 수의를 입고 창백하게 누워있는 아빠를 보고 나서야 정말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들도 없는 우리 집, 아빠의 영정사진은 맏딸인 내가 들었다. 장례지도사의 지도아래 뭔지도 모르고 장례식을 마쳤고, 모든 것을 다 끝내고 돌아온 집에 더 이상 아빠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빠가 없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아직도 안방에 들어가면 아빠 냄새가 나고, 아빠 옷이며, 칫솔이며 숟가락이며 남아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그냥 장기 출장을 간 것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친척들과 이웃들은 우리 집을 걱정했다. 엄마는 당뇨와 고혈압이 있어서 경제적으로 우리 가정을 이끌어 갈 수가 없었고, 대신 가장역할을 할 아들도 없었으며, 맏딸인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막내인 여동생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슬퍼하기도 버거운데, 지금 당장 우리 가정의 생활비를 책임져 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컸다. 앞으로 대학도 가야하는데, 입학금과 등록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됐다. 낭떠러지 끝에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내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고, 낭떠러지 아래서는 펄펄 끓는 용암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절망의 나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우리가족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은 바로 산재보험이었다. 근로하는 도중 벌어진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였기에 우리가족이 산재보험 유족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손길이 우리 가족을 절망의 나락에서 건져내 주었다.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 매월 아빠의 평균급여의 52~67%에 해당하는 연금을 받을 수가 있다고 했다. 가정의 버팀목인 가장이 없는 우리 집의 새로운 가장 역할을 해줄 고마운 제도였다. 유족연금 덕분에 생활비 걱정 없이 남은 가족끼리 아빠의 빈자리를 서로 보듬어주며 더욱 단단하게 강해질 수 있었고, 아빠의 빈자리를 알게 된 이후 위기 가정에게 사회복지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느낄 수 있게 된 나는 세상의 모든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게 복지향상에 기여하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아빠의 빈자리에 슬퍼하며 절망하지 않고, 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지켜보고 있을 아빠 역시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작년에 드디어 꿈을 이뤘다.

4년 전, 평범했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그 날의 악몽 같은 사건은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남게 됐지만, 그 상처 위에 새살이 돋을 수 있도록 희망을 선사해 준 산재보험 덕분에 우리 가족은 아빠의 빈자리 속에서도 행복함을 느끼며 서로 아껴주며 살아갈 수 있게 됐다. 나 역시 바라던 꿈을 이루고 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산재보험 50주년을 맞이하는 2014년의 어느 봄날 아침 수기 글을 작성하며 산재보험이라는 제도에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낀다. 대한민국의 모든 근로자가 산재보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희망과 행복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응원한다.

※ 이 작품은 근로자를 위한 신문 뉴스워커에서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의 제공으로 게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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