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시사의 창] 침략전쟁의 성격마저 부인하는 위험한 일본
[뉴스워커_시사의 창] 침략전쟁의 성격마저 부인하는 위험한 일본
  • 염정민 기자
  • 승인 2019.08.29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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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꿔 쓰고 싶어 하는 건 한국이 아니라 일본
▲ 그래픽_황성환 뉴스워커 그래픽 1담당

[뉴스워커_시사의 창] 지난 8월 27일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은 기자회견 중,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는 기자의 질문에 “한국이 역사를 바꿔 쓰고 싶어 한다고 해도 그것은 안 되는 일.”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를 바꿔 쓰고 싶어 하는 건 일본

고노 외상의 발언은 1965년 청구권 협정의 유효함을 강조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그간 태평양 전쟁과 만주 사변 등 외국을 침략했던 전쟁에 대한 인식이 안이함을 넘어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행동마저 보인 일본이 이와 같은 발언을 내놓는 것은 적반하장에 가까운 행위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정부가 역사를 바꿔 쓰고 싶어 하는 것은 아베 총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그는 올해에도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여 2012년부터 7년째 봉납을 이어오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를 단순히 일본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나라의 안위를 기원하는 종교시설로 파악한다면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공물 봉납을 비판하는 쪽이 편협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야스쿠니 신사의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의 극우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 당시 구체제였던 도쿠가와 막부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일본 왕이 직접 참배하는 등 그 규모가 커졌다.

건립 당시는 일본 내전 성격을 가진 혁명군과 막부군의 전투로 인한 전사자를 호국 영령으로 모시는 것이어서 국제적인 분쟁거리는 거의 없었지만, 그 후 일본의 군국주의와 맞물려 대표적인 침략전쟁으로 분류되는 전쟁들의 전사자도 신사에 대규모로 합사되면서 국제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1978년에는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태평양 전쟁 전범 14인의 위패가 합사되면서 일본은 그들이 벌였던 전쟁의 침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합사 당시 일본 극우세력들은 도조 히데키 등을 전쟁범죄자로 규정한 것은 연합국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일본인이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영향력이 강한 일본 정치가들도 공공연하게 이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크다.

2013년 5월 18일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당시 일본유신회 공동대표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으로 볼 수 없으며 침략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학적인 행동이라고 발언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우리로 비유하자면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도쿄도지사를 1999년부터 2012년까지 10년이 넘게 장기 역임했던 인물로 현재까지도 그의 계파 중 일부가 일본 여당인 자민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일본의 방위상을 지내기도 했던 ‘이나다 도모미(稲田朋美)’ 자민당 총재 특별보좌관은 도쿄전범재판 역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으며 2016년에는 현직 방위상으로는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국제적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이나다 특보가 아베 총리의 인물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태평양전쟁의 침략적 성격을 규정한 도쿄전범재판을 부정하는 그녀의 행동과 발언은 아베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의 비공식적인 입장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

실제로도 아베 총리는 이나다 특보의 행동이나 발언을 저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올해에도 그녀를 통해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나다 특보의 개인적 가치관일 뿐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태평양전쟁, 중일전쟁 등 분명한 역사적 사실도 부정하나?

일본의 여러 인물을 통해 일본이 수행한 전쟁의 침략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만을 고찰한다면 일본이 다른 나라를 상대로 침략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어렵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항공모함과 항공기를 이용하여 하와이 진주만에 배치된 미국 함대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극우작가인 ‘하쿠타 나오키(百田尚樹)’는 20세기 전쟁에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고 일본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선전포고의 유무가 아닌 침략전쟁으로 비난받는 것을 왜곡하는 주장으로 볼 수 있다.

1941년 11월 18일 사할린으로 이동한 일본함대는 11월 26일에는 사할린을 떠나 하와이로 이동을 개시했으며 12월 7일에는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항공모함만 6척이 동원될 정도로 일본의 대규모 함대가 물리적으로 6000~7000km나 떨어져 있는 하와이 진주만으로 열흘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이동했다는 사실은, 당시 일본이 자국을 방어하기 위한 의사에서 함대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 미국 함대를 선제공격하려는 의사에서 함대를 움직인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게다가 일본은 진주만의 얕은 수심을 극복하기 위해 나무 안정판을 장착한 어뢰를 개발하는 등 치밀한 침공계획을 세운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의 성격을 침략전이 아닌 방어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다.

한편 일본 측 주장에 의하면 1937년 루거우차오(蘆溝橋,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당시 루거우차오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국군과 일본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1937년 7월 7일 밤 일본군 일부가 훈련을 하던 도중 총성과 함께 일본군 1명이 행방불명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7월 8일 새벽 중국군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을 개시한 것을 의미한다.

이때 행방불명되었던 일본군 병사는 중국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설사 문제로 병영을 잠시 이탈했다가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중국 측은 우발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일본 측의 자작극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많다.

자작극이건 우발적이건 이 루거우차오 사건 직후 7월 11일 협정체결을 통해 외교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듯 했으나, 일본 내각은 스기야마 육군대신 등 강경파의 주장에 따라 지원군을 증파하는 등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을 결정한다.

일본 측은 루거우차오 사건을 우발적인 사고로 보고 전선을 확대한 경향이 있다는 주장이지만 사건발생초기 실종 병사가 복귀한 것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나서도 외교적 해결보다 전면전을 선택했던 점을 고려하면 일본 측의 주장에 설득력은 떨어진다.

게다가 루거우차오 사건을 포함하여 중일전쟁과 관련한 갈등관계를 심화시키는 사건들 모두가 일본 측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점은 일본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도발했을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린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누가 봐도 일본이 수행한 전쟁의 침략적 성격을 부정하기 어려움에도 정면으로 침략전쟁임을 부정하는 그 누구보다 역사를 바꿔 쓰고 싶어 하는 것은 일본이 아닌지 고노 다로 외상에게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