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비3달, KT1달, 더 이상 채무없음”... “나머지 돈으로 화장 시켜 달라"

이제라도 국가폭력 피해자 위한 트라우마센터 갖춰져야

80년 5월 국가폭력에 의해 무고한 광주시민이 끔찍하게 희생당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5.18 유공자가 40년 동안 “삶이 힘들고 희생자들이 자꾸 떠오른다”며 고통과 아픔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괴로움 등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끝내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 1일 오전 7시께 광주광역시 광산구 한 영구임대아파트 8층에 거주하던 5.18유공자 정병균(60세)가 1층 화단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정씨는 이날 극단적인 선택에 앞서 “○○아파트이다. 빨리 출동해 자신의 시신을 수습해 달라”고 112에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출동한 경찰은 정씨의 지갑에서 유서가 나온 점을 토대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태극기에 덮혀 장례식장 떠나는 5.18유공자 정병균씨
태극기에 덮혀 장례식장 떠나는 5.18유공자 정병균씨

지난달 28일 공과금 125만원을 납부한 정씨는 영수증 뒤쪽에 “관리비3달, KT1달, 더 이상 채무없음” “나머지 돈으로 화장 시켜 주십시오”라고 짤막한 유언을 남겼으며 620여만 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유품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정씨는 어렸을 적 부모와 헤어진 뒤 친형과 고아원에서 자랐다. 1980년 직업소년원에서 생활하며 구두닦이 생활을 하던 중 5.18민중항쟁이 일어났고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항쟁에 참여했다.

정씨는 상무관 등에서 시신운반조로 활동하며 시신을 씻고 확인하는 작업과 함께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벌어지던 80년 5월 27일 옛 전남도청을 총을 들고 지켰다는 이유로 붙잡혀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형집행정지면제로 풀려났다.

석방 이후 정씨는 가족에게 “대검에 찔려 죽은 사람들이 꿈에 보인다. 나도 자꾸 오라고 한다”고 호소하며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정씨는 이후 부인과 이혼하고 자녀를 미국으로 입양 보낸 후 30여 년 동안 외부와 단절한 채 술에 의지하며 살아왔다고 주위 사람들은 전했다.

故 5.18 유공자 정병균씨 유서
마지막 서툴게 쓴 故 5.18 유공자 정병균씨 유서

친구 김석호(59)씨는 “정씨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항쟁에 참여했던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 등 정의감 속에 5.18에 참여했지만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5.18항쟁 당시 우리 직업소년원 120명 중 90%가 고아였으며 그중에서 3분2 이상이 시민군으로 참여했고 일부 원생들이 부상당하고 죽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최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형사 보상금 2천만 원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돈을 형편이 어려운 다른 5.18 유공자들에게 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5.18보상금 4천만 원 중 2천만 원은 친형에게 주고, 나머지 돈은 자녀를 입양한 가족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6월에는 남은 형사보상금으로 서울, 부산, 대전 등 전국 일주를 한 뒤 “처음으로 세상사는 느낌을 받았다‘고 친구인 김씨에게 털어놨다.

가득한 각종 공과금 수납고지서
각종 공과금 수납고지서

정병균씨는 빈소도 차려지지 않은 채 장례를 치를 뻔했으나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5.18단체 등이 나서 장례를 치루고 3일 오후 1시 30분 국립5.18묘지에 안장됐다.

장례식장에서 상주 역할을 했던 이지현(전,5.18부상자회 회장)씨는 “수많은 사람들이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40년 동안 고통 중이다”며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조속히 5월 관련법 등이 처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가차원의 트라우마센터가 전무하다”며 “관련자들의 전수 조사와 함께 이제라도 국가폭력 피해자를 위한 트라우마센터가 갖춰져 제 역할을 해야 더 이상 관련자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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