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도입된 증권집단소송제가 12년간 소송건수가 한 자릿수에 그치고, 법원의 소송허가 결정을 얻는 데만 평균 4년 이상이 걸리는 등 ‘유명무실’한 것으로 조사돼,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도이치은행 ELS 본안판결은 소제기 공고일로부터 4년 10개월여 만에 선고된 것이다. 국민의당 채이배 의원실의 ‘증권집단소송 현황’ 자료를 보면, 이 제도가 2005년 1월 시행 이후 12년 동안 제기된 소송은 고작 9건에 그친다.

[뉴스워커] 증권집단소송의 첫 본안판결이 나왔다. 집단소송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지 12년 만이다.

집단소송(Class action)은 여러 명이 한꺼번에 제기하는 공동소송과 달리 대표당사자가 승소하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 전원이 배상을 받는 제도다. 증권 분야에만 2005년 제한적으로 도입됐다. 

4일 법조계와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7부(재판장 김 경 부장판사)는 '한국투자증권 부자아빠 주가연계증권(ELS) 289호'에 투자했다 손해를 본 김 모씨 등 투자자 6명이 도이치방크를 상대로 제기한 증권관련집단소송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7부(부장 김경)는 김모씨 등 도이치은행 투자자 6명이 도이치은행을 상대로 낸 증권 관련 집단소송에서 “김씨를 포함한 피해자들에게 85억8,589만여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승소판결했다고 20일 밝혔다. 

증권 관련 집단소송은 일부 피해자가 대표로 소송을 내면 다른 피해자들도 같은 판결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 판결이 확정되면 도이치은행이 운용한 ‘한국투자증권 부자아빠 ELS 제289회’ 상품에 투자했다가 만기일에 약 25%의 손실을 본 투자자 464명에게 효력이 미친다. 

한투289ELS는 만기평가가격 결정일에 KB금융 보통주의 주가가 5만4740원 이상이고 삼성전자 보통주 주가가 42만9000원 이상일 때 수익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상품이었다. 

하지만 도이치은행이 2009년 8월 장 마감 직전 KB금융 주식을 낮은 가격에 대량 매도하면서 종가가 하락해 결국 조건충족은 무산됐고 투자자들은 손해를 봤다. 이에 투자자들은 2012년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주식매도행위는 주가연계증권과 관련해 수익 만기상환 조건이 성취되지 않도록 주식의 기준일 종가를 낮추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며 "자본시장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시세조종행위 내지 부정거래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어 "투자자들은 만기상환조건이 충족될 경우 지급받기로 약정된 투자원금의 128.6%에 해당하는 상환금에서 이미 지급받은 투자원금의 약 74.9%에 해당하는 상환금의 차액 상당의 손해를 입었다"며 "도이치은행은 원고들에게 85억8500여만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 증권집단소송현황 (자료=채의배 의원)

◆ 대법, ELS 상품마다 판결 다른 이유는…‘시세조종행위’여부

최근 대법원의 ELS(주가연계증권) 손해배상 판결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3월 도이치은행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고, BNP 파리바에게는 손해배상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건에서 도이치은행과 BNP파리바 모두 ELS 기초자산을 매각해 시세를 조종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각 재판에서 쟁점은 ELS 운용사들의 주식 대량매도 행위가 시세조종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투자자들은 운용사들이 투자수익금 지급 위험을 피하기 위해 특정 시점에 ELS 기초자산을 대량매도했다고 주장했다.

각 재판부는 운용사들에게 시세조종을 할 동기가 있었는지, 기초자산이 ELS의 기본원리인 '델타헤지'에 따라 운용됐는지에 주목했다. 델타헤지는 주가 등락과 ELS 상품 조건에 따라 기초자산 보유량을 결정하는 거래 방식이다.

대법원은 ELS와 관련해 도이치은행과 BNP 파리바에 '시세조종 유인'이 있었는지를 따져보고 주식 매도시간대, 수량, 매도호가, 매도관여율과 같은 요소를 기준으로 '주식매도 형태'가 어떠했는지를 살펴 ‘시세조종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ELS 상품의 특성상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시세조종과 부정거래를 했는지를 판단하지는 않았다. 

증권사들의 ELS 기초자산 매도 ‘목적’을 기준으로 손해배상 책임이 있는지를 판단한 것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시세조종 등을 할 유인이 있고, 만기기준일 전에는 델타헤지를 한 정황이 없다면 법원이 금융사의 기초자산 매도를 시세조종행위로 판단할 여지가 커진다. 

대법원 1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3월 한국투자증권의 '부자아빠 289회' 상품의 만기 평가가격 결정일에 기초자산을 대량매도한 도이치은행의 행위는 '시세조종행위' 내지 '부정거래행위'에 해당돼 투자자들에게 상환금을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반면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현대증권이 판매한 '현대증권 제2007-576회 사모 ELS' 상품운용 과정에서 시세조종 의혹을 받은 BNP파리바의 ELS 기초자산 매도행위는 '시세조종'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지난 3월 10일에는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신영증권이 판매한 ELS 상품의 중간평가일에 보유한 주식을 대량 매도한 BNP파리바의 행위로 개인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었더라도 거래가 헤지 목적에 부합했다면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한국투자증권의 '부자아빠 289회' 사건은 “도이치은행의 기초자산 매도로 만기기준일에 상환조건의 성취가 무산됐다”며 “만기기준일에 상환조건을 무산시키면 해당 ELS와 관련해서는 확정적으로 원리금 상환부담이 감소해 만기기준일에는 상환조건의 성취를 무산시킬 유인이 크다”며  도이치은행에 시세조종 유인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현대증권이 판매한 '현대증권 제2007-576회 사모 ELS' 사건은 “BNP파리바의 주식 매도로 만기기준일에 상환조건의 성취가 무산됐지만, 주식을 매도하면서 주식매도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전체 거래량의 10% 범위 내에서 거래량가중평균가격에 맞춰 매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BNP파리바의 실제 매도가격이 평균 매도가격 이상이었으며 거래량 역시 한국거래소의 가이드라인이 정한 범위 내에 있었다"며 주식매도형태를 근거로 시세조종이나 부정거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 주가연계증권(ELS)은 개별주식의 가격이나 주가지수에 연계돼 투자수익을 결정하는 유가증권이다. ELS는 기초자산인 지수나 특정 종목 주가가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면 사전에 약정한 대로 연 5∼6% 수익률을 얻을 수 있지만 기준 아래로 떨어지면 원금손실까지 입을 수 있다. (자료=한화생명)

◆ 증권집단소송 12년간 9건 ‘유명무실’…소송허가에만 51개월

2005년 도입된 증권집단소송제가 12년간 소송건수가 한 자릿수에 그치고, 법원의 소송허가 결정을 얻는 데만 평균 4년 이상이 걸리는 등 ‘유명무실’한 것으로 조사돼,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도이치은행 ELS 본안판결은 소제기 공고일로부터 4년 10개월여 만에 선고된 것이다. 국민의당 채이배 의원실의 ‘증권집단소송 현황’ 자료를 보면, 이 제도가 2005년 1월 시행 이후 12년 동안 제기된 소송은 고작 9건에 그친다. 

2005~2008년에는 단 한 건도 없었고,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은 매년 1건씩, 2013년과 2014년은 2건씩이었다. 2015년은 소송 제기가 없었고, 2016년은 1건에 그쳤다. 또 9건 중에서 1단계인 법원의 ‘소송허가 결정’이 내려진 사건은 겨우 5건에 불과하다. 화해로 종결된 진성티이씨 분식회계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 4건의 소송허가 결정에 걸린 시간은 평균 51.5개월에 달한다. 

현행 집단소송제도가 유명무실한 상태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논란이 된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의혹 및 대우건설·모뉴엘·STX그룹·효성에서 발생한 대규모 분식회계 사건, 한미약품의 늑장 공시 및 미공개정보 유출 등 투자자들의 피해 빈도와 규모는 날로 증가하고 있으나, 그에 상응하여 투자자들이 입은 손해가 제대로 회복되었는지 여부는 의문이다. 

분식회계, 부실감사, 주가조작, 내부자거래 등 증시에서 발생하는 불법행위로 인한 소액투자자들의 집단적 피해를 효율적으로 구제하겠다는 것이 증권관련 집단소송법 제정의 취지였다. 그러나, 법 제정 당시 남소를 우려해서 소송 대상과 관련 요건들을 엄격히 하였고, 그 결과 제도 시행 12년이 되도록 판결이 선고된 것이 1건에 불과하며, 소 제기 자체가 9건에 그치는 등 오히려 제도의 존폐를 우려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투자자 중 일부가 승소하면 소송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투자자들도 동일한 효력을 적용받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제도 도입 이후 처음 1심 판결이 나는 데 무려 12년이 걸릴 정도로 소송이 장기화하고, 소송 제기 건수가 한 자릿수에 그치는 것은 지나치게 까다로운 소송 요건과 법원의 소극적 태도 등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전문가들은 미국의 증거개시제도(디스커버리)처럼 불법행위를 보다 쉽게 입증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도이치은행 시세조종 사건의 원고 쪽 변론을 맡은 법무법인 한누리의 김주영 대표변호사는 “미국은 원고가 증거개시제도를 통해 피고 쪽에 사건 관련 자료를 일괄 제출하도록 요구할 수 있고, 일본도 이와 비슷한 문서제출명령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채이배 의원은 지난해 8월 증권집단소송제가 1단계 소송허가결정 청구소송과 2단계 본안소송으로 이원화돼 사실상 6심제로 운영되고 장기화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송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채 의원은 “최근 사회적으로 대우조선해양·모뉴엘·에스티엑스의 분식회계 사건과 한미약품 늑장 공시 및 미공개정보 유출 사건으로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는데, 증권집단소송제를 통한 투자자들의 피해 구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법 개정이 시급하다”며 “소비자와 관련된 다른 영역으로 집단소송제를 확장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도이치 ELS 소송을 맡은 법무법인 한누리 김주영 대표는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기고에서 소비자 분야에서 집단소송제는 더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주영 대표는 "증권관련집단소송처럼 소위 OPT-OUT 방식(적극적으로 제외신고를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소송에 참가하는 형태)인 미국식 집단소송제가 적합한지, 아니면 OPT-IN 방식(적극적으로 피해신고를 해야 배상받는 형태)인 일본식 집단소송제가 적합한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증권투자피해는 개별적으로 계산이 가능하고 거래소와 증권사에 대한 사실조회로 피해자를 파악할 수 있지만, 소비자소송의 경우에는 개별 소비자의 협조 없이 피해자와 그 피해내역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OPT-IN 방식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법무법인 한누리 김주영 대표는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피해자집단의 피해를 일거에 배상하도록 하는 집단소송제를 소비자분야에 도입하는 것은 소액 다수의 피해를 입은 소비자의 실질적인 재판청구권 보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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