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바가지 된 대한체육회, 이것 때문에 구사일생?..문화통치 저항의 시작
파리올림픽 스타들의 귀환부터 마라톤 교통사고까지... 제105회 전국체전, 그 사회적 의의
제105회 전국체육대회가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막을 내렸다. 올해 체전은 파리 올림픽의 영광을 이어받아 더욱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됐다. 펜싱의 오상욱(대전시청)은 파리 올림픽 2관왕의 위상을 다시 한번 입증하며 남자 일반부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양궁의 임시현(한국체대)은 파리에서의 3관왕에 이어 이번 체전에서 4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육상 트랙에서는 고승환(광주광역시청)이 4관왕에 올랐다. 200m와 400m 계주, 혼성 1,600m 계주에서 대회 신기록과 한국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한국 육상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특히 김해종합운동장의 육상트랙이 세계육상연맹으로부터 '클래스-1' 인증을 받아 더욱 의미 있는 기록들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번 체전은 아쉬운 사고도 있었다. 하프마라톤 경기 중 한 선수가 70대 운전자의 차량에 치이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다. 경기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차량이 진입해 선수를 들이받은 것이다.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안전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한편 전통 씨름에서는 김민재(영암군민속씨름단)가 올해만 6번째 장사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씨름판을 평정한 그의 활약은 한국 전통 스포츠의 저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독립의 열망을 담은 공 하나,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의 표현, 전국체전의 기원과 역사적 배경
지난 24일, 안세영 및 체육회 부조리 조사 차원에서 대한체육회 회장이 국회 현안질의에 불려 나와 엄청난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이 조직을 보는 국민의 시선도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피부에 가장 와닿는, 그들 존재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전국체육대회’다.
1920년 11월,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 독립운동가 이상재의 시구로 시작된 '전조선야구대회'는 전국체육대회의 첫걸음이었다. 일제강점기, 스포츠는 저항의 몸짓이자 독립의 열망을 담은 몸부림이었다. '건민'(건강한 국민)과 '신민'(새로운 국민)이라는 슬로건 아래, 체육을 통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이 대회는 한반도 최초의 유료 입장 스포츠 행사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당시 10개 팀이 참가했으며, 중학단(학생부)과 청년단(일반부)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배재고보와 배재구락부가 각각 우승을 차지했다.
1934년부터는 축구, 테니스, 육상, 농구 등 다양한 종목이 추가되며 종합체육대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대회는 중단의 위기를 맞았다.
해방 이후 1945년, 전국체전은 새로운 국가 건설의 상징으로 부활했다. 1948년부터는 대한민국 정부 공인 대회로 승격되어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국체전은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그것은 단순한 스포츠 대회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이자 민족의 혼이 깃든 문화유산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불꽃, 근현대를 거치며 국민체육에 이바지
1950년 한국전쟁 중에도 전국체전은 계속되었다. 1951년 광주에서 열린 대회는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이는 스포츠가 단순한 경기를 넘어 국민 화합의 장으로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1957년은 전국체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해였다. 이때부터 서울과 지방을 번갈아 가며 대회를 개최하는 '순회 개최'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부산에서 처음 열린 지방 개최 대회는 그야말로 축제였다. 지역 주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원봉사자로 나섰고, 도시 전체가 들썩였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전국체전은 더욱 확장되고 체계화되었다. 특히 1972년 '소년체전'의 신설은 의미가 컸다. 이는 미래의 스포츠 스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요람이 되었다. 또한, 1980년대부터는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서만 대회를 개최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는데, 이는 지방 체육 인프라 확충에 큰 도움이 되었다.
2000년대 들어 전국체전은 또 다른 변화를 맞이했다. 단순한 경기 위주의 행사에서 벗어나 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종합 축제로 발전한 것이다. 2019년 서울에서 열린 100회 대회는 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남북 체육 교류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스포츠를 통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하기도 했다.
‘우리 고장에서 열리는 전국체전, 우리가 주인공이다’ 개최 방식, 순환 개최 시스템
1957년 부산에서 시작된 지방 순회 개최는 이제 전국체전의 상징이 되었다. 이 시스템은 수도권에 집중된 체육 인프라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지방 경제를 활성화하며, 전국 각지의 특색 있는 문화를 알리는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개최지 선정 과정은 그 자체로 치열한 경쟁이다.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공모에 각 지방자치단체가 참여하며, 체육 시설의 상태, 숙박 및 교통 인프라, 행정적 준비 능력 등이 꼼꼼히 평가된다. 특히 최근에는 장애인체전과의 연계성도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되고 있다.
전국체전의 상징적 행사인 성화 봉송도 순환 개최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된 성화는 전국을 순회하며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한다. 올림픽 성화가 그 기원인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시작한다면, 전국체전의 성화는 한민족의 건국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화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체전이 끝난 후에도 그 효과는 계속된다. 새로 지어진 경기장들은 전지훈련장이나 생활체육 시설로 활용되어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다. 전국체전의 순환 개최는 우리나라 스포츠와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국토 균형 발전과 국민 통합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중요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 균형발전의 디딤돌, 경제 활성화와 문화 융합의 장, 전국체전의 지역공헌
전국체전은 개최 도시에 상당한 경제적 효과를 안겨준다. 2018년 익산에서 열린 전국체전의 경제 효과는 무려 1,345억 원에 달했다. 이 중 345억 원은 관광 산업에서 발생한 수익이었다. 선수들과 응원 온 가족들, 그리고 구경 온 관광객들이 지역의 숙박 시설과 음식점을 이용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다.
대회 준비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인프라 투자는 장기적으로 지역 발전의 토대가 된다. 익산시는 369억 원을 들여 경기장을 개보수했고, 이 시설들은 체전이 끝난 후에도 시민들의 생활체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천시의 경우, 전국체전을 위해 지은 경기장들을 이후 다양한 생활체육 활동과 전지훈련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국체전은 개최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도 한몫한다. 대회 기간 동안 전국의 이목이 쏠리면서 자연스럽게 도시의 명소와 특산품이 알려진다. 이는 관광객 유치로 이어져 지속적인 경제 효과를 낳는다. 실제로 많은 도시들이 체전 유치를 지역 홍보의 기회로 삼고 있다.
더불어 전국체전은 문화와 스포츠의 융합을 통해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개회식과 폐회식은 단순한 의식이 아닌 그 지역의 문화를 알리는 종합예술 공연으로 발전했다. 이는 전국체전이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지역 문화 축제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비인기 종목의 최후 보루, 꿈과 희망의 무대, 올림픽이 못 담는 각종 종목도 확대
전국체전은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게 '최후의 보루'나 다름없다. 미디어의 관심도 적고 재정적 지원도 부족한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게 전국체전은 1년을 기다려온 꿈의 무대다. 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의 관심을 받아 후원받을 수 있고, 국제대회 출전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슈 종목의 경우, 전국체전에서 8연패를 달성하며 주목받았다. 이를 계기로 우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선수들의 처우도 개선되었다. 근대5종의 전웅태 선수는 전국체전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우리금융그룹의 후원을 받게 되었고, 결국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기업들의 스포츠 마케팅 전략 변화로 비인기 종목에도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SK텔레콤은 비보잉(브레이킹) 종목을 후원하며 젊은 층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정부와 공공기관도 비인기 종목 지원에 나서고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은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비인기 종목 선수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전국체전이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스포츠계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종목과 선수들이 동등한 기회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보내야 할 때다.
엘리트와 생활 체육의 융합, 쉽지 않은 길, 생활체육인엔 최대의 축제, 체육회의 근본
전국체전은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이 만나는 독특한 장이다. 운영 방식은 남녀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로 나뉘어 진행되며, 부문별로 다양한 종목에서 경쟁이 펼쳐진다. 이러한 구분은 연령과 전문성에 따라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면서도, 다양한 수준의 선수들에게 참가 기회를 제공한다. 2024년 김해에서 열린 제105회 전국체전에는 21,043명의 엘리트 선수들이 참가했고, 마라톤과 같은 일부 종목에서는 일반인들도 참가할 수 있어 생활체육인들에게도 꿈의 무대가 되었다.
2016년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된 이후, 엘리트와 생활 체육의 융합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융합은 전국체전의 의미를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이제 전국체전은 단순히 엘리트 선수들의 경연장이 아닌, 온 국민이 함께 즐기고 참여하는 종합 스포츠 문화 축제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스포츠를 통한 국민 건강 증진과 지역 사회 활성화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한 중요한 걸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 간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지, 대회의 규모와 효율성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 등의 문제는 앞으로 전국체전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특히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의 구분이 현재 스포츠 환경에 적절한지, 또 이러한 구분이 선수들의 장기적인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전국체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작은 불씨는 이제 온 나라를 밝히는 거대한 횃불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대한체육회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최근 안세영 선수의 폭로로 인한 논란과 국회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대한체육회가 여전히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100년 역사의 전국체전이라는 상징적인 행사 때문이다.
바쁜 현대 사회에 모든 국민이 스포츠에 관심이 있기는 힘들다. 우리나라가 80년대 이후 세계 무대로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은 월드컵, 올림픽 같은 굵직굵직한 국제대회 때나 스포츠에 반짝 관심을 가지곤 한다. 체육회를 향한 여론의 분노도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스포츠 대회가 존재하며 분명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산이다. 전국체전! 내년 대회는 한 번쯤 기특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구경해보는 것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