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출신 유승민 417표의 반란, 3연임 저지한 체육계 자존심, 안세영의 눈물을 닦을까?

파리의 눈물에서 서울의 승리까지, 선수들이 직접 바꾼 체육계, 정부 개입 없이 자정능력

2025-01-15     권용진
탁구 레전드 유승민 후보가 417표를 얻어 379표에 그친 이기흥 현 회장을 38표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2244명의 선거인단 중 1209명이 투표에 참여해 53.9%의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선거는 체육계의 자정능력을 입증하는...[본문 중에서]

대한체육회의 역사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제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탁구 레전드 유승민 후보가 417표를 얻어 379표에 그친 이기흥 현 회장을 38표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2244명의 선거인단 중 1209명이 투표에 참여해 53.9%의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선거는 체육계의 자정능력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강태선 서울시체육회장이 216표, 강신욱 단국대 명예교수가 120표를 기록했고, 오주영 전 대한세팍타크로협회 회장과 김용주 전 강원도체육회 사무총장이 각각 59표와 15표를 얻었다. 선거 직전까지도 이기흥 회장의 3연임이 유력했던 상황에서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지난해 파리올림픽에서 안세영 선수의 폭로로 극대화된 체육계 개혁의 목소리가 마침내 결실을 맺은 순간이기도 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이자 2016년부터 2024년까지 IOC 선수위원을 지낸 유승민 당선인은 2019년부터 대한탁구협회장을 역임하며 체육 행정 경험도 쌓아왔다. 앞으로 4년간 유승민 체제의 대한체육회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동계올림픽, 2026 아이치·나고야아시안게임, 2027 충청권하계세계대학경기대회,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등 중요한 국제대회를 치르게 된다. 38표라는 아슬아슬한 차이가 만들어낸 이 승리는 과연 현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가처분 기각, 단일화 실패에도 38표 차의 드라마... '대세 이기흥' 무너뜨린 417표의 반란


대한체육회 선거 전날까지만 해도 이기흥 회장의 3연임은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강신욱 후보가 제기한 선거 중지 가처분 신청은 법원에서 기각됐고, 반이기흥 연대를 표방한 후보들의 단일화마저 불발되면서 표 분산은 불가피해 보였다. 지난 4일 열린 정책토론회에서는 이기흥 회장에게 공격이 주목될 것 같은 예상을 깨고 후보 선수들끼리 공방전이 더 치열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리한 것은 이 회장이었다. 현직 프리미엄에 조직력까지 갖춘 이기흥 회장의 승리를 점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은 빗나갔다. 유승민 후보가 417표를 얻어 379표에 그친 이기흥 회장을 38표 차로 제치고 당선된 것이다. 강태선 후보 216표, 강신욱 후보 120표, 오주영 후보 59표, 김용주 후보 15표 등 반이기흥 성향 후보들에게 600표 이상이 분산됐음에도 이뤄낸 극적인 승리였다. 만약 단일화가 성사됐다면 표 차이는 더욱 벌어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기흥 회장은 3연임을 준비하면서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장 선거에 처음 출마한 유승민에게 진 배경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단 체육계 내부의 변화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기흥 회장은 지난 8년간 체육회를 이끌며 조직 사유화 논란, 체육의 정치집단화 논란, 각종 비위 혐의와 직무정지 처분, 문체부와의 갈등 등 끊임없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대한체육회 노동조합의 반발, 비체육인 출신 회장으로서의 한계 등도 지적받아 왔다. 결국 선거인단은 체육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선택했고, 그 적임자로 선수 출신의 유승민을 지목한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2024년, 파리의 눈물로 시작된 혁명... 안세영이 열고 유승민이 완성하다


지난해는 한국 체육계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해였다.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 13개라는 역대급 성과를 올렸지만, 그 이면에는 체육계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안세영 선수의 용기 있는 폭로는 이러한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선수들에게 강요된 복종, 불합리한 의무 규정, 후원사 물품 강요 등 오랫동안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온 폐단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물론, 당시 배드민턴협회장은 김택규였고 이 회장 본인은 직접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대한민국 체육을 총괄하는 리더로서 관리·감독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안세영의 폭로 후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안세영 선수의 표현 방법이 서툴렀다’며 주요 쟁점에 대한 입장을 조목조목 밝혔는데, ‘체육회장으로서 선수에 공감하지 못하고 꾸짖거나 변명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았다.

안세영의 폭로가 영 불편했는지, 귀국 선수단 해단식은 파행으로 끝나며 문체부와의 갈등을 극한으로 보여줬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차관이 선수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에도, 대한체육회장과 선수촌장은 갑작스럽게 해단식을 취소해 버렸다. "선수들의 피로를 고려한 결정"이라는 해명은 공허하게 들렸고, 적어도 이는 체육계 수뇌부의 독단적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팬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한편으로는 대한축구협회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정몽규 회장의 4선 도전을 앞두고 제기된 각종 의혹, 직원 채용 비리, 금품 수수, 입찰 비리 등은 체육계 전반의 부패한 민낯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였다. 선임 과정부터 시작해서 100억 원에 달하는 클린스만 감독 위약금 문제, 천안 축구센터 건립을 둘러싼 의혹, 615억 원의 마이너스 통장 개설, 홍명보 선임 논란 등 축구협회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K리그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늘어가는데, 공 한번 차보지 않은 협회장의 행보에 한국 축구에 대한 걱정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안세영의 폭로는 단순한 고발을 넘어 체육계 전반의 변화를 요구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침묵하던 선수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팬들의 분노는 체육계 개혁에 대한 강력한 요구로 이어졌다. 결국 이러한 흐름이 선수 출신 유승민이라는 새로운 리더십을 선택하는 원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안세영의 눈물로 시작된 변화의 바람이 마침내 체육계 권력 구조의 지각변동으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IOC와 FIFA, 계엄의 그늘에 가린 문체부, 끝내 휘두르지 못할 유인촌의 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취임 이후 줄기차게 체육계 권력의 사유화 문제를 지적해 왔다. 특히 이기흥 대한체육회장과 정몽규 축구협회장의 장기 집권 시도에 대해 강력한 제동을 걸었다. 문체부는 지난해 11월 이기흥 회장에 대한 직무정지 처분을 내렸고, 연임이 성사되더라도 승인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까지 천명했다. 각종 비위 의혹에 대한 감사 결과에서도 채용 비리와 금품 수수, 입찰 비리 등 27건에 달하는 위법 사항이 제기됐다.

유인촌이 사력을 다해 연임을 막아왔고 문체부와 체육회의 대립은 극한까지 갔다. 그러나 이것을 딱히 두려워하지는 않은 듯하다. 국제 스포츠 기구의 '독립성 조항'을 넌지시 던지는 것만으로도 문체부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을까? IOC 헌장과 FIFA 정관은 정부의 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이들은 문체부의 개입이 IOC와 FIFA의 자율성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한국이 국제 스포츠계에서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지난해 방한 시 정몽규 회장을 향한 공개적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문체부는 이러한 국제 스포츠계의 압박 앞에서 적극적인 제재를 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감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 회장의 직무를 정지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실질적인 제재를 가할 수도 없었고 이 회장은 어찌어찌 자격을 갖추고 다시 선거에 출마했다.

설상가상으로 12월 3일 발생한 계엄 사태는 문체부의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대통령 탄핵 정국과 국정 동력 마비 속에서 정부 부처의 권한은 현저히 떨어졌고, 유인촌 장관 역시 사퇴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육계 개혁을 위한 정부의 통제력은 사실상 실효성을 잃어버렸다. 체육계 권력의 사유화를 막으려던 문체부의 시도는 국내 정치의 혼란 속에서 무력화된 것이다.


체육회장의 막강한 권한과 무게, 4400억+80개 단체 통할권... '체육 대통령'의 달콤한 유혹


대한체육회장은 '체육계의 대통령'이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지닌다. 연간 4400억 원에 달하는 예산 집행권과 58개 정회원종목단체, 17개 시도체육회, 17개 해외지부를 통할하는 조직의 수장이다. 각종 국제대회 파견권과 선수 선발 과정에 대한 최종 결정권까지 쥐고 있어, 한국 체육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다.

이 자리의 영향력은 국내를 넘어 국제 스포츠계까지 미친다. 체육회장은 국가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을 겸직하며, IOC와의 직접적인 교류 창구가 된다.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대회에서 대한민국 체육계를 대표하는 얼굴이자, 스포츠 외교의 최전선에 서는 인물이다. 이러다 보니 국빈급 대우를 받고 의전상 특혜도 대단하다. 해외 입국 비자가 필요 없고, IOC 총회 참석 때는 차량과 통역, 의전 요원이 지원된다. 실제로 2019년 이기흥 회장이 NOC 대표 자격으로 IOC 위원에 선출된 것처럼, 이 자리는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막강한 권한은 자칫 오용될 위험도 크다. 특히나 국제기구가 보장하는 자율성과 독립성이라는 보호 아래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자칫 조직의 사유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인사권과 예산 집행의 독점은 불투명한 의사결정과 비리의 온상이 될 수 있다. 더구나 가뜩이나 계엄 사태로 외교력이 사실상 마비 상태인 지금,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동계올림픽부터 2028 LA올림픽까지, 앞으로 4년간 치러질 주요 국제대회들을 고려하면 체육회장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금메달리스트에서 지도자, 외교관, 체육 행정가로… '선수의 눈으로' 바라본 새로운 비전


대한체육회 42대 회장 자리에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앉게 됐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탁구 금메달의 주인공 유승민이 체육계 수장이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지도자 교체를 넘어 한국 체육계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작년 파리올림픽에서 안세영 선수의 폭로로 시작된 선수들의 목소리가 마침내 체육계 최고위직 선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유승민의 이력은 현대 체육계가 필요로 하는 다면적 역량을 보여준다. 그는 금메달리스트로서의 성취를 넘어 IOC 선수위원으로서 8년간의 국제 스포츠 외교 경험을 쌓았고, 대한탁구협회장으로서 실질적인 행정 경험도 겸비했다. 특히 IOC 선수위원 시절에는 부위원장직을 맡아 11개의 IOC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국제 스포츠계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러한 경험은 앞으로 치러질 밀라노동계올림픽, LA올림픽 등 주요 국제대회를 앞두고 있는 한국 체육계에 큰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수 출신이라는 강점이 자칫 새로운 한계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체육행정은 현장 경험 못지않게 경영 능력과 산업적 안목이 필요한 영역이다. 4400억 원의 예산 운용과 80여 개 단체를 아우르는 조직 운영은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다. 때문에 '팀 유승민'의 구성이 중요하다. 재무, 법률, 조직 관리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업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체육계의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체육계 내부 인맥에 갇히는 것이다. 선후배 관계나 체육계 인맥에 기반한 낡은 관행이 되풀이된다면, 이는 이기흥 체제와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형태의 폐쇄성이 될 수 있다. 유승민 당선인에게는 선수 출신으로서의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하되, 열린 시각으로 체육계 밖의 혁신적 아이디어도 수용할 수 있는 균형 잡힌 리더십이 요구된다. 파리의 눈물로 시작된 변화의 바람이 진정한 개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섬세한 균형이 필수적일 것이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의의, 아직 살아있다! 체육계가 스스로 증명한 자정의 힘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한체육회가 보여준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행태는 오랫동안 팬들의 분노를 샀다. 파리올림픽 선수단 해단식 파행이나 각종 비리, 의혹들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선거권이 없는 팬들은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정부의 통제나 국정감사에 기대를 걸었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체육계 권력이 국제 스포츠 기구의 비호 아래 견고한 성을 쌓은 것처럼 보였다.

정부와 체육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찾아온 이번 선거의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만약 이 회장의 3연임이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문체부의 이기흥 해임은 헛소리가 될 가능성이 컸다. 계엄 상황 당시 국무위원인 유인촌이 법원도 문제없다며 중지 가처분을 기각한 선거에서 당선된 회장을 해임하는 상황 자체가 국제스포츠 기구에는 엄청난 개입 명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계엄이 아니었더라도 해임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직무정지를 연장하는 방법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국민과 정부와 다투며 체육계의 개혁은 뒤로 밀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8표 차의 승리는 한국 체육계가 아직 희망이 있음을 증명했다. 이는 단순한 회장 교체가 아닌, 체육계 스스로가 자정능력을 보여준 역사적 순간이었다. 더 이상 IOC나 FIFA와 같은 국제기구들이 '자율성'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부실한 체육 행정을 비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선수들의 목소리로 시작된 변화가 마침내 체육계 최고위직 선출로까지 이어진 것은, 한국 체육의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칫국은 이르다. 이제 시작이다. 유승민 당선인 앞에는 산적한 과제들이 놓여있다. 체육회 산하 수많은 협회, 지역단체와 발걸음을 맞추고 체육계의 폐쇄성과 불투명성을 타파,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체육 행정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2026 밀라노동계올림픽부터 2028 LA올림픽까지, 중요한 국제대회들도 기다리고 있다. 유승민의 당선이 이 모든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점을 임기 내내 잊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