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 국내 125조 투자 발표...‘로봇 파운드리’ 등 청사진에 부품사 방향전환 기로

자율주행 부품 등 으로 매출 구조 전환한 국내 부품사는 아직 소수에 불과

2025-11-17     천인규 기자

현대자동차그룹이 내놓은 125조2000억원 국내 투자 계획안에 부품업계의 관심은 투자 규모보다 언제, 어디에 먼저 돈이 투입되는지에 쏠렸다. 당장 내년 설비 투자 계획을 줄여야 하는 업체가 적지 않은데, 그룹이 말하는 인공지능(AI)과 로봇,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구상이 실제 발주와 라인 전환으로 언제 내려올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CES 2024에서 소개된 현대자동차의 SDV 기술 [사진=현대자동차]

현대차그룹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 한국에 125조20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2021~2025년 국내에 집행한 89조1000억원보다 크게 늘어난 규모다. 이중 절반 가까이를 AI·전동화·로보틱스 같은 미래 사업에 배정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발표 시점 또한 미국과 관세 합의 직후였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내 투자를 늘리겠다는 계획이지만, 같은 시기 현대차그룹이 미국과 인도에서도 공장 증설을 병행하고 있다는 점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그룹은 이미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와 배터리를 함께 생산하는 메타플랜트를 짓고 있고, 2030년까지 미국 판매 차량의 80% 이상을 현지에서 만들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상태다.

인도에도 2030년까지 51억 달러(약 7조원)를 추가로 넣어 수출 거점으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한국은 그 사이에서 로봇·AI, 고부가 부품, 시험 생산을 맡는 쪽으로 역할이 재조정되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로봇 분야는 그 변화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해 물류·사족보행 로봇을 개발해 왔고, 이번 국내 투자 계획에서는 고성능 AI 데이터센터와 물리적 로봇을 시험하는 전용 센터를 한국에 짓겠다고 밝혔다.

완성차 회사가 공장 자동화용 로봇을 쓰는 수준을 넘어, 로봇을 직접 설계, 검증, 양산하는 구조를 한국에 만들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로봇 공장만이 아니라 ‘로봇 파운드리’ 개념이 등장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파운드리는 원래 반도체에서 설계회사가 회로도를 넘기면 대신 웨이퍼를 찍어주는 위탁 생산 모델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대차그룹은 로봇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

자동화된 공장에서 만드는 로봇 [사진=인공지능(ChatGPT) 생성 이미지]

국내에는 이미 산업용 로봇을 전업으로 만드는 회사들이 많다. HD현대로보틱스는 1980년대부터 현대중공업, 현대차 공장의 용접·도장·이송 로봇을 담당해 온 업체로, 2020년 분사 이후 올해까지 40종이 넘는 로봇을 생산하면서 ‘국내 최대 산업용 로봇 제조사’ 타이틀을 지키고 있다.

두산로보틱스, 한화로보틱스, 뉴로메카 등 협동 로봇, 서비스 로봇 제조사까지 포함하면 한국은 이미 세계 4위 수준의 산업용 로봇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다. 이런 판에서 현대차그룹이 별도의 로봇 파운드리를 세우면, 기존 로봇 기업과의 관계 설정이 앞으로 몇 년간 중요한 변수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부품사 입장에서는 더 복잡하다. 산업통상부는 향후 10년 안에 내연기관 부품 기업의 70%를 전기, 수소, 자율주행 등 미래차 부품 공급업체로 바꾸겠다는 목표를 내놓은 바 있다. M&A 자금과 설비 투자 비용 상당 부분을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실제로 전기 구동계, 전장, 자율주행 부품으로 매출 구조를 바꾼 국내 업체는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현대차그룹은 관세 지원과 금융 프로그램으로 미국 수출 과정의 비용 부담을 일정 부분 떠안겠다고 했지만, 그다음 단계에서는 부품사가 스스로 어떤 부품을 만들며 살아남을지를 선택해야 할 전망이다. 

HD현대로보틱스의 소형 굴착기 하부프레임 용접 자동화 솔루션 [사진=HD현대로보틱스 유튜브 캡처]

국내 로봇 산업의 위치도 변수다. 한국은 제조업 현장에 설치된 로봇 수로 따지면 세계 상위권이지만, 세계 시장에서 이름이 바로 떠오르는 로봇 브랜드는 아직 많지 않다. 한때 스마트폰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국내 점유율은 높은데 글로벌 브랜드 파워가 약한 구조가 다시 반복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에서는 테슬라가 공장용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를 올해 수천 대 단위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놨고, 중국에서도 여러 업체가 공장·물류용 휴머노이드 시제품을 내놓고 있다. 이런 경쟁 속에서 현대차그룹의 로봇 공장과 파운드리가 글로벌 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 아직 그 윤곽은 뚜렷하지 않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투자 프로젝트와 관련해 “역대 최대 규모의 중장기 국내 투자와 끊임없는 혁신으로 대한민국 경제 활력 제고에 기여할 계획”이라며 “협력사 관세 지원과 상생협력 프로그램을 확대해 국내 자동차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도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