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김영욱 시사컬럼니스트] 거대 야당이 문재인 정부 인사에 급제동을 걸고 나서 정국이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다.

11일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임명동의안이 부결됐다. 출석의원 293명 중 찬성 145명, 반대 145명으로 가결을 위한 찬성표(출석과반 147표)에 2표 모자랐다.

헌재소장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의 헌법기관장 임명이 국회 표결로 좌절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윤성식 감사원장 이후 14년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9일 “다양한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 달라는 국민의 여망에 부응할 적임자”라며 김 후보자 인사를 직접 발표했고, 인사청문회가 국회에 제출된 지 111일 만에 이뤄졌다.

▲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청와대와 여당 그리고 힘쎈 여당의 날선 비판이 오가고 있다.<그래픽_진우현 기자>

한국당과 바른정당 등 보수야당은 통합진보당 해산을 반대한 소수의견을 낸 김 후보자에 대해 일찌감치 반대 공동전선을 형성하면서 표의 응집력을 높였다.

이날 표결로 223일간 계속돼 온 초유의 헌재소장 장기 공백 사태에 청와대 인사 책임론까지 겹쳐 문 대통령 임기 첫 정기국회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혼란 속에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날 수석·보좌관회의가 끝난 직후 김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을 보고받은 뒤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한 참모는 “굉장히 굳은 표정이었다. 크게 화가 났다는 걸 표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김 후보자 부결에 대한 청와대 반응을 박수현 대변인보다 격이 높은 윤영찬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이 직접 발표할 것을 지시했다.

윤 수석은 춘추관 브리핑에서 “부결은 상상도 못했다. 무책임의 극치, 반대를 위한 반대로 기록될 것”이라며 야당을 비판했다. 이대로 가면 야당에 정국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었다.

여기에 북핵,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 외교·안보 이슈 대처 과정에서 발생한 지지층 이탈을 막고 인사 파문 책임론을 차단하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다.

그러나 여소야대라는 현실적인 제약을 뛰어넘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 청와대의 고민이다. 일각에선 청와대가 말로만 ‘협치’를 외쳤지 진심으로 야당을 설득했느냐는 자성론도 나온다.

청와대가 날 선 반응을 내놓은 것은 이날 부결을 김 후보자 개인에 대한 반대는 물론 새 정부가 추구하는 사법 개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김 후보자 부결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보복이고, 정권교체에 불복하려는 것 아니냐”며 청와대와 주파수를 맞췄다.

친문(親문재인) 핵심인 김경수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낡은 것은 여전히 죽지 않았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이번 국면을 통해 ‘개혁 대 적폐’라는 프레임을 더욱 강조해 문재인 식 국정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것이다.

‘개혁 대 적폐’의 구도는 여론전을 통해 이날 표결에서 캐스팅보트로서의 위력을 보여준 국민의당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이다. 향후 유사한 사태의 재발을 미리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실감한 여소야대의 벽을 뛰어넘을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게 현실적 고민이다. 지금 국회에서는 김명수 후보자 임명동의안, 내년도 예산안, 각종 국정과제 입법 등 야당의 협조가 필요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1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백봉정치문화교육연구원 개원식에서 김 후보자 인준 부결과 관련해 “염치없는 소행”이라며 야권을 직설적으로 겨냥했다. 추 대표는 “막막하고 답답하다, 국민에게 낯을 들 수 없다”고도 했다.

한편 추 대표와 박지원 국민의당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축사를 통해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추 대표는 “헌법기관으로서 헌법재판소장의 목을 날렸다, ‘그래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것이 이른바 캐스팅보트다’고 하면서 협치라고 말하고, 대통령이 소통을 하지 않는다고 탓을 할 수가 있겠냐”며 국민의당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집권 여당의 대표가 저렇게 야당을 송두리째 짓밟아 버리고 화풀이를 하면은 협치가 되겠느냐”고 대응했다.

추 대표의 축사 도중 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자리를 떴고, 추 대표는 단상에서 내려온 뒤 “내 이야기 좀 듣고 가라”는 박 전 대표의 만류에도 야당 의원들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퇴장했다.

이어 단상에 오른 박 전 대표는 “집권여당의 대표가 저렇게 야당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리고 화풀이를 하면 협치가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박 의원은 “이번 부결은 오만의 극치에 있는 문 대통령에게 국민이 경종을 울린 것”이라며 “집권여당의 대표(추 대표)가 저렇게 야단을 치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생각한다”고도 꼬집었다.

지금 국회에서는 김명수 후보자 임명동의안, 내년도 예산안, 각종 국정과제 입법 등 야당의 협조가 필요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김 후보자 낙마는 출범 4개월을 갓 넘긴 문재인 정부에 대한 민의(民意)의 경고다. 후보자의 비리 의혹엔 눈을 감고 ‘코드’만 맞는다면 중책을 맡기다 벌어진 인사 난맥과 사법권력 교체 기도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했다.

이번 부결에서 확인됐듯,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선 협치가 필수적이다. 문 대통령부터 몸을 낮춰 협치에 앞장서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헌재는 헌법 수호의 마지막 보루다. 문 대통령은 헌재소장 후임자 지명을 서두르길 바란다. 이번에는 ‘감’이 되는 중립적 인사를 지명해 하루빨리 헌재 공백 사태를 해소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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