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김영욱 시사칼럼니스트] 지난 1995년 5월 27일 토요일, 비 오는 주말 오후. 집에서 휴식하고 있는 필자의 무선호출기 일명 ‘삐삐’가 울려 됐다. 당시 P언론사 통일원(지금의 통일부) 출입기자인 필자에게 ‘긴급기자회견’을 알리는 정부의 호출이었다.

통상 기자회견 시간으로 보기엔 늦은, 그것도 토요일 밤 8시.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 5층 통일원 기자회견장은 내·외신기자로 북새통을 이뤘다. 통일·외교기자 외에는 출입이 철저히 통제됐고 회견내용문은 사전 공개되지 않았다.

나웅배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은 이 자리에서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대북 곡물지원을 제의 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의 회견문을 읽어 내려갔다.

김영삼 대통령도 전날 통일관계장관회의에서 “순수한 동포애로 우리 쌀이 부족하면 외국에서라도 사서라도 북한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나 장관은 전했다.

▲ 북한의 도발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만 무도 11차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을 감행했다. 이에 더해 북한은 통일부가 대북 지원 재개 의사를 발표한지 하루도 되지 않은 15일 오전 ICBM을 발사했다.<그래픽_진우현 기자>

이에 따라 북한에 쌀을 제공하기 위한 남북한 차관급 회담이 1995년 6월 22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고, 우리 측은 우선 쌀 15만 톤, 대략 100만 섬을 북측에 무상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1차분 쌀 15만 톤은 국적선을 이용, 원산지는 표시하지 않고 정미 40㎏, 375만 폴리프로필렌(PP)포대에 담겨 북측에 전달됐다.

이 과정에서 6월말 첫 지원 쌀을 실은 배 ‘씨 아펙스호’는 북측의 인공기 게양강요로 회항하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당시 이에 대한 북측 대외협력위 전금철 위원장의 공식사과를 우리 측이 받아들려 7월 3일 비로소 첫 대북 지원 쌀이 청진항에 하역했다.

이때부터 시작했던 국내산 쌀의 대북지원은 2010년 5000톤을 끝으로 중단됐다. 이 기간 동안 북한에 지원된 쌀은 9차례 총 180만5000톤에 이른다.

이후 수차례 국정감사와 관련 시민단체 등을 통해 북한에 지원된 쌀이 우리 측의 동포애 의도와는 달리 북한군 군량미로 악용됐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문재인 정부가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의 모자보건 사업에 8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과 유니세프의 요청에 따라 북한의 아동·임신부 영양 강화, 백신과 필수 의약품, 영양실조 치료제 지원 사업에 돈을 대려는 것이다.

이 문제는 21일 통일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에서 논의된다. 원안대로 결정되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대북 지원이 이뤄진다.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지원은 2015년 12월 유엔인구기금(UNFPA)의 사회경제인구·건강 조사 사업에 80만 달러를 지원한 후 21개월 만에 재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과연 지금이 정부가 대북 지원 재개를 추진해도 좋을 때인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인도적 대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추진한다’는 원칙에 따라 지원을 재개하려 한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만 열 차례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을 감행하고 급기야 6차 핵실험으로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특히 북한은 통일부가 대북 지원 재개 의사를 발표한 후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인 15일 오전 ICBM을 발사했다.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이 오늘 평양시 순안비행장에서 발사한 탄도미사일 1발이 일본 상공을 지나 북태평양 해상에 떨어졌다”며 “이 미사일의 최고 고도는 770여㎞, 비행거리는 약 3700여㎞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지난해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에는 ‘지원 규모와 시기는 종합적으로 고려해 검토 한다’는 단서를 달면서 실제 지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새 정부 출범 후 넉 달 만에 지원 재개가 추진되고 있는데 아무리 인도적 지원이라고 해도 결코 섣불리 결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는 대북 압박에 긴밀한 공조가 절실한 국제사회에도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정부의 대북 지원 소식이 전해지자 당장 일본 관방장관은 “유엔 안보리에서도 북한에 대해 각별히 엄격한 제재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며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압력을 훼손하는 행동은 피할 필요가 있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대북 인도적 지원을 완전히 끊을 수야 없더라도 당장 대북 압박을 쬐여 가고 있는 한·미·일 공조 체제에 균열을 내 가면서까지 무리하게 추진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 도발의 직접 당사자인 우리 정부가 최고 수준의 대북 제재에 앞장서지 않고 엇나가는 듯 인상을 주면 공조를 다지기 어렵다.

지금 급한 것은 대북 지원 재개가 아니라 핵과 미사일 위협에 맞설 수 있는 지혜와 응집력을 모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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