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김영욱 시사컬럼니스트] 지난 7월 영국에서는 희귀병에 걸린 한 살배기 찰리 가드를 두고 생명윤리 논쟁이 벌어졌다.

찰리는 작년 8월 태어나자마자 세계에서 단 16명만 앓고 있는 ‘미토콘드리아결핍증후군(MDS)’ 진단을 받았다. 이는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뇌와 근육을 움직이지 못하는 희귀 질환이다.

찰리는 같은 해 10월 런던 그레이트 오몬드 스트리트 병원(GOSH)에 입원해 치료를 시작했다. 병원 측은 아기의 증상이 갈수록 악화되자 부모에게 연명치료 중단을 설득했다.

부모가 병원의 제안을 거절하자 병원은 연명 치료 중단을 허락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3심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법원은 ‘존엄한 죽음이 찰리에게 최선의 이익’이라며 의료진 손을 들어줬다.

이에 전 세계적으로 의료 윤리 논쟁에 불이 붙었다. 찰리의 연명치료 중단을 비판하는 시위가 열리는가하면 찰리의 생명을 유지해 달라는 부모의 호소에 프란체스코 교황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갖가지 사회적 문제를 낳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생명존엄에 관한 문제로 웰다잉 즉, 죽을 수 있는 권리는 오래 전 부터 또 하나의 이슈가 되고 있다. 사진은 영국 법정드라마 실크, Gofundme charlie, 하나생명 홍보 블로그 등에서 사용됐다.<그래픽_진우현 기자>

찰리의 부모는 아기를 미국으로 데려가 실험적 치료를 받으려 했지만 결국 연명 치료를 포기했다. 미국 의료진도 치료가 이미 늦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후 찰리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겨져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했고 첫 돌을 며칠 앞두고 숨을 거뒀다.

지난 15일 찰리의 부모는 아기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희귀병을 앓는 어린이 환자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찰리가 살아있을 적 기부 받은 130만 파운드(약 19억 원)를 재단 운영에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가 지난 23일부터 임종을 앞둔 환자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 이른바 ‘웰다잉(well-dying·존엄사)법’이 전국 대형병원 10곳에서 시범 시행에 들어갔다.

한 해 전체 사망자의 20%가 심폐소생술이나 항암제 투여 등의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있고 이에 가족들은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의 10명 중 9명 이상이 연명치료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도 구태의연한 법제 탓에 한 해 5만 명 이상의 말기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고통 속에 숨지는 현실을 합리적이라 볼 수는 없다.

내년 2월 발효되는 웰다잉법은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환자가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네 가지의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새 법은 회생 가능성 없는 임종 단계의 환자가 자기 의사를 문서로 남겼거나 가족이 합의하면 의사 2명의 확인을 거쳐야 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대신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건강을 되찾을 희망 없이 고통과 절망, 비용을 가중시키는 의료과잉 폐해를 줄이게 됐다는 점에서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마저 없지 않다.

국내에서 존엄사 논의를 불러일으킨 대표적 사례는 ‘보라매병원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이다.

보라매병원 사건은 1997년 만취해 넘어져 머리를 다친 남편이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면서 간병과 치료비 부담이 힘들어진 아내가 병원에 퇴원 조치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의료진이 사망에 따른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받고 퇴원시켰다가 대법원에서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은 사건이다.

2008년 발생한 김 할머니 사건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조직검사를 받다가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 할머니의 가족이 평소 할머니의 뜻을 존중해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병원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하면서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다. 대법원은 최초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로 대부분의 병원이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한 퇴원 요구를 거절해왔다.

존엄사는 세부적으로 보면 안락사와는 구별된다. 안락사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영양 공급을 중단하거나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된다.

이번 연명치료 중단 결정은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의료행위나 영양분·물·산소 공급은 중단하지 않는 만큼 소극적 안락사와는 차이가 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는 존엄사와 안락사가 합법이다. 미국은 오리건 주(州)와 워싱턴 주에서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다. 일본도 말기 환자에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웰다잉법으로 품위 있는 죽음, 준비된 죽음을 맞을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고 그것도 처음 시행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자칫 생명 경시 풍조로 이어지거나 경제적 부담에 따른 남용·악용이 초래되지 않도록 세심한 안전장치들이 필요하다.

보완할 것들도 많다. 가장 급한 것 중의 하나는 호스피스와 인프라 확충이다. 호스피스 완화병상부터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국가적 관심을 쏟고 예산도 투입해야 한다. 관련 건강보험 수가 개발 등도 시급하다.

정부와 정치권이 앞장서 ‘웰다잉’ 후속 실행에 만전을 기하길 바란다. 품위 있고 준비된 죽음도 국가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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