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김영욱 시사컬럼니스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1일 육성 신년사로 한국에 평창 올림픽까지 언급하며 ‘관계 개선’ 메시지를 던진 반면 미국에는 ‘핵 위협’ 강도를 높여 그 배경이 궁금하다.

김정은은 새해 첫날부터 한국에 평창 겨울올림픽과 관련해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반면 “핵 단추가 내 책상 위에 있다”며 미국을 압박했다.

김정은이 대남(對南) 유화책과 대미(對美) 협박을 담은 신년사를 내놓은 것이다.

▲ 그래픽_진우현 기자

한국에 유화 몸짓을 보이는 듯 하면서 고조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약화시키기 위해 한미 동맹 간 균열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신년사를 보도한 조선중앙통신을 보면 뿔테안경, 은회색 정장, 회색 넥타이 차림의 김정은은 다양한 해석만큼이나 표정도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감색 정장 차림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올해를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해로 빛내야 한다”고 말한 뒤 “남조선에서 머지않아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경기대회에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정은이 지난해 핵폭주를 이어가며 문재인 정부의 대화 제안에 응하지 않다가 돌연 이 같은 메시지를 보낸 것은 새해 벽두부터 한미 동맹을 흔들고 올해 한반도 판세를 자신이 주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또 문재인 대통령이 올림픽 기간 한미 합동 군사훈련 연기 검토를 공식적으로 밝힌 지 열흘 만에 나온 메시지여서 주목을 끈다. 올림픽이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상황임을 고려할 때 남북 실무 접촉이 곧 있을 것으로 보인다. 꽉 막혀 있던 대화의 문이 모처럼 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로 평가된다.

그러나 김정은은 미국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의 핵 타격 사정권 안에 있다”며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는 것, 이는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강력하고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을 보유하게 됐다”며 “미국은 결코 나와 우리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오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데 이어 ‘대미 전쟁 억지력 확보’를 선언한 것이다.

김정은은 “핵탄두들과 탄도로켓들을 대량 생산, 실전배치 사업에 박차” “즉시적인 핵반격 작전태세 유지” 등 미국과 대등한 핵전력을 갖추기 위해 핵프로그램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달라진 게 없다.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켜온 핵·미사일 도발은 쏙 빼놓고, 방어훈련에 시비를 거는 것도 변함없다. 평창올림픽과 남북대화를 지렛대 삼아, 국제사회 제재로 인한 어려움을 타개해 보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바뀐 것이라고는 대남·대미 전략을 분리한 ‘투 트랙 ’전술뿐이다.

김정은의 제안에 일단 청와대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박수현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평창 올림픽이 평화 올림픽으로 성공적으로 개최된다면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세계 평화와 화합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청와대는 그간 남북관계 복원과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시기 장소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혀왔다”고 강조했다.

청와대가 김정은 신년사에 공식 논평을 낸 것은 처음이다. 2월로 예정된 한미 연합 훈련 키리졸브의 연기 결정도 조만간 발표될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31일(현지 시간) “핵 단추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는 김정은의 신년사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지켜보자(We‘ll see)”고 말했다.

김정은의 대화 제의로 남북 관계 개선이 마치 코앞에 다가온 양 호들갑을 떨어 선 안 된다. 단기적 성과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대화의 세부 조건과 속도 등을 세밀하게 조절해 나갈 필요가 있다.

북한 대표단의 평창올림픽 참가가 급선무인 만큼 여기에 집중하는 게 작지만 현실적이다. 우발적인 군사 충돌을 막기 위해 올림픽 기간 핫라인 개설에만 합의해도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남북협상에 나서게 된 정부의 외교안보 역량이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기’가 될 수 있는 국면이다. 새해 벽두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다.

저작권자 © 뉴스워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