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유린됐던 인권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우리 시대 있어서는 안될 기억해야 할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 황성환 그래픽 1담당>

[뉴스워커_김태연 기자] 1975년~1987년까지 참혹한 인권유린으로 수많은 피해자들을 고통의 세월로 이끌게 한 ‘형제복지원 사건’이 30년 만의 재판 개입으로 진상규명이 이뤄질 전망이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전형적인 인권유린 사태로 분류되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무수한 피해자를 낳게 한 참혹함을 띄고 있는 반면, 제대로 된 가해자 처벌과 진실을 가리는 법리가 적용되지 않았기에 30여 년간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욱 처참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지난 20일 대검찰청의 비상상고 권고를 기점으로 대법원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시 심리하는 비상구제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30년간 포획당한 진실과 어두운 배후가 낱낱이 밝혀지는 진상규명이 이뤄질지 귀추가 주목되는 모습이다.

◆ 피해자 약 3천여명..군사독재정권 ‘인권유린’ 사태로 분류된 참혹한 過去事

30여 년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이 같은 순간을 두고 정권 교체 이후 진보 성향에 맞닿은 시대적 흐름과 각종 진보 언론들의 집중 취재가 빛을 발한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부산의 형제복지원에서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장애인과 고아 등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약 3000여명의 시민들을 불법 체포, 감금, 성폭행, 강제노역 등을 시킨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인권 유린 사태로 꼽힌다.

형제복지원이 12년 간 운영되는 동안 무려 사망자 수만 513명에 달하며, 이 중 일부는 암매장되는 등 시신조차 찾지 못한 상태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발생한 시점인 1975년은 군사독재정권시절로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거리를 정화하는 명목으로 형제복지원을 비호해 금전적 지원까지 해가며 국가적인 ‘장려’ 활동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형제복지원을 운영하는 주체는 민간이었으나 형제복지원이 활동을 전개할 정책적 근거를 수립, 장려하고 보조한 주체는 당시 국가 정부 기관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형제복지원 활동의 정책적 근거는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410령에서 뒷받침됐다.

정부는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인들을 영장 없이 구금할 수 있도록 훈령을 만들었기에 이 사건의 책임 소재는 국가에 있음을 지목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거리 정화 명목으로 단속 대상이 된 부랑인은 경찰과 공무원의 자의적 판단 아래 실시됐다.

결국 거주지가 불분명한 노숙자부터 아이들까지 고아로 삼기에 이르렀고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수용시설에 수용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형제복지원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 가운데는 고문, 구타 이외에도 강제 노역과 굶주림 등으로 인한 아사, 또는 성폭행으로 인한 사망자도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언론에 알려진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으로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용으로 판매되기도 하는 등 군사독재정권 시절 ‘인권유린’의 참혹한 실상을 극명히 나타냈다.

집계된 형제복지원 피해자는 약 3000명으로 추정되나 유가족들까지 합 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정권 외압으로 축소된 핵심인물 수사와 가벼운 형량..“실종된 죗값”

인권유린 사태의 참상은 1986년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김용원 주임검사와 포수가 산속 강제노역 현장을 발견해 수사에 나서면서 독재 정권 차원의 문제로 변모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전두환 정권 수뇌부의 잇단 압력과 수사 방해로 사건의 핵심 인물인 박 원장의 혐의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 했다.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박 원장의 국고보조금 혐의 입증을 시도해 총 11억4200만원을 찾아냈지만 검찰 지휘부 지침에 의해 6억8250만원으로 낮출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털어놨다.

이후 박 원장은 특수감금 및 횡령혐의로 기소됐으나 7번의 재판 끝에 특수감금 혐의는 무죄로 확정됐고 대법원은 1989년 3월 박 원장에게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이후에도 항소심 재판을 거치며 박 원장과 배후 인물에 대한 형량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결국 박 원장은 이후 겨우 2년이 지난 1989년 7월 20일 출소해 정당한 죗값을 치루지 못 한 채 2016년 사망했다.

6억여 원의 벌금 역시 재판 과정에서 감경되며 없어졌고 사건 핵심인 폭행, 살인, 성폭행, 시신암거래 등 문제는 기소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적용할 혐의가 뚜렷했음에도 기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에는 당시 정권이 이 사건을 반정부성향에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사건이 사회에 알려진 1987년 당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기점으로 6월 항쟁이 이어진 격동의 시기였고 시민단체와 각종 항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됐기 때문에 일종의 ‘은폐’를 시도해 수사와 형량 모두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 진상 규명 작업 30여 년 만에..특별법 제정도 남은 과제로 떠올라

독재정권에 가려져 석연치 않은 판결과 수사 방해 공작 등으로 30여년을 끌어온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이 차차 규명될 전망이다.

대검찰청 산하 검찰개혁위원회(위원장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가 지난 9월 13일 비상상고 권고를 계기로 대법원이 다시 사건을 심리할 수 있는 비상구제절차 진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비상상고는 확정된 형사 판결에서 위법 사항이 발견됐을 때 대법원이 다시 심리하도록 하는 비상구제절차다.

대검은 “위헌인 내무부 훈령 410호가 적법하고 유효함을 직접적 근거로 삼아 무죄를 선고한 이 사건의 확정판결은 심판의 법령위반이 있는 경우로서 비상상고 대상이 된다”고 신청 이유를 밝혔다.

다만 형제복지원 사건은 반인권적 국가범죄로 기록되고 있는 만큼 국가차원이 나서 피해자와 유족들의 명예회복과 손해배상 등 적법한 배상 절차가 이뤄질 수 있게 하는 ‘특별법’ 제정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무죄판결 효력을 뒤집어야 하는 과제 속에 이미 30여년이란 세월이 지나 증거와 사실들을 입증하기 어려워진 상태로, 국회 특별법을 통과시켜 손해배상 청구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 검찰총장 비상상고 등 사회 전반에서 진상 규명 작업을 실시하고 있는 가운데, 국회 특별법 통과에 시선이 쏠리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경직성을 해제할 정부의 개입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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