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운전으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법원의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이수한 후 감형받아 화제다. 이는 국내 첫 사례로서, 이 프로그램을 적용한 재판장이 현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장을 맡은 정준영 부장판사라서 더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를 두고 정준영 재판장이 이재용 부회장 공판 진행 중 ‘준법감시제도’ 강화 등의 과제를 계속 언급하는 것이, 이 부회장에게도 ‘치유법원 프로그램’과 유사한 감형 조건을 제시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4일 감형받은 A 씨는 지난 1월 음주운전을 하다가 다른 차량을 들이받아 사고를 내고도 피해자 구호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 후 사고현장에 도착한 경찰의 음주측정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A 씨는 이미 과거에도 음주운전으로 벌금형을 2번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 이를 고려해 1심은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정준영 부장판사의 항소심 재판부는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최초로 시범 시행하며, 지난 8월 A 씨의 보석 석방을 허가했다. ‘치유법원 프로그램’이란 피고인에게 일정한 조건을 부여하고, 그 조건을 완수하는 모습을 보고 양형에 참고하려는 조치다. 형벌 부과보다는 ‘재발 방지’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재판부는 A 씨에게 3개월간 금주, 밤 10시 이전 귀가, 비공개 온라인 카페에 동영상을 포함한 ‘일일 보고서’ 업로드 등의 보석 조건을 내걸었다.

재판부는 A 씨에게 “치유법원 프로그램 첫 졸업자로서 밝고 따뜻한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 달라”고 당부하며 감형을 선고했다. 또 “이번 시범 실시 결과를 토대로 우리나라에도 ‘치유법원 프로그램’이 정식으로 시행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덧붙이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음주운전’ 처벌을 강화하는 추세에 어긋나, 오히려 ‘음주운전’을 조장하는 듯한 판결을 내렸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정준영 부장판사는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이러한 기대를 거는 듯하다. 서울고법 형사1부 재판장인 정 부장판사는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국정농단’ 관련 파기환송심 1차 공판을 시작할 때부터 이 부회장에게 부적절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 부장판사는 1차 공판에서 “이 부회장이 삼성의 총수로서 해야 할 일을 해주기 바란다”며, 삼성의 혁신을 주문했다. 또한, 기업의 경영상 비리에 대해 삼성그룹 차원에서 어떻게 차단해 나갈 것인지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지난 6일 이 부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세 번째 공판기일에서도 정 부장판사의 조언은 이어졌다. “또 다른 정치 권력에 의해 향후 똑같은 뇌물 요구를 받더라도 기업이 응하지 않을 수 있는 삼성그룹 차원의 답을 다음번 기일까지 재판부에 제시해달라”고 말했다. 삼성 측에서는 네 번째 공판기일까지 ‘뇌물방치 책’을 내놔야 한다. 이에 재판부가 만족할 만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삼성전자 측의 움직임도 분주해진 것으로 전해졌다. 재판부가 수긍할 만한 대책을 마련한다면, 이 부회장의 양형에 유리하게 적용되리라 전망하기 때문이다.

정 재판장의 이러한 이례적 발언들은 삼성 측에 큰 부담을 준 듯 보인다. 그러나 이를 되집어 보면, 음주운전 피고인이 ‘치유법원 프로그램’을 잘 마쳐 형량을 감량 받은 것처럼, 재판부가 제시한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면, 이 부회장도 형을 감량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준영 부장판사(좌)이재용 부회장(우)
정준영 부장판사(좌)이재용 부회장(우)

이러한 재판부의 당부가 반드시 이 부회장의 형을 감량하려는 사전조치라는 근거는 될 수는 없다는 반론도 합당하다. 하지만, 기업 총수가 저지른 범죄의 비난 정도와 ‘국정농단 사건’이라는 사회적 파장을 고려했을 때, 재판부가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지속해서 기업의 미래 운운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삼성 측에선 재판부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양형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다”라며,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감형하겠다는 의지를 대놓고 보여주는 것 같다”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이재용 부회장의 4차 공판기일은 내년 1월 17일로 정해졌다. 이때 손경식 CJ그룹 회장이 이 부회장 측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다. 손 회장에 대한 증인신문을 재판부가 수용하고, 1월 중순 이후로 공판기일이 잡히면서 재판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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