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국민의 시선] 1심, 2심 뒤집은 대법원판결…. “‘괜찮다’ 성관계 동의 아냐”
[뉴스워커_국민의 시선] 1심, 2심 뒤집은 대법원판결…. “‘괜찮다’ 성관계 동의 아냐”
  • 정선효
  • 승인 2020.12.08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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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성폭행한 육군 하사에게 대법원이 내린 판결
그래픽_황성환 뉴스워커 그래픽1팀 기자
그래픽_황성환 뉴스워커 그래픽1팀 기자

‘괜찮다’...


2014년 7월,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육군 하사 A씨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B씨, 지인 C씨 등과 함께 술을 마셨다. B씨는 구토할 정도의 만취 상황에서 C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화장실에 들어간 A씨는 욕조에 있는 B씨를 발견했다. A씨는 ‘피해자’였던 B씨에게 물었다. ‘괜찮냐고.’ B씨는 괜찮다고 답했다. A씨는 재판에서 당시 B씨에게 수차례 괜찮냐고 물었는데, 매번 ‘괜찮다’라고 답했다며, 자발적인 성관계였다고 주장했다.

1심과 2심에서는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대법원에 오기까지 A씨는 두 번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고등군사법원 재판부는 B씨가 대부분 상황을 잘 기억하는데, 성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진술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B씨의 고소 경위가 눈에 들어온다. B씨는 사건 이후 A씨로부터 SNS 친구 신청을 받았다. 당시 사건이 떠오른 A씨는 우울증을 겪었고, 상담도 받았다. 상담을 받은 뒤 A씨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당시 성관계가 자발적이었다고 생각하는 A씨에게서는 당연히 사과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B씨는 A씨를 고소했다.

A씨의 입장에서는 의문이었을지 모르겠지만, B씨가 진정으로 괜찮았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B씨는 당시 만취 상태였고, 이미 C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상황에서 A씨의 ‘괜찮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B씨가 온전한 상태였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B씨는 ‘괜찮을 리가 없었다.’


방어기제...자아붕괴의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


방어기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잠재적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적인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조절하거나 왜곡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사용하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이다. 무엇이 위협적인지 분명치 않은 상황이나 자아개념을 위협하는 심적 갈등이 있을 때 일어나며, 이성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불안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자아를 붕괴의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사고 및 행동 수단이다.

사건 당시 B씨의 ‘괜찮다’라는 말도 이 방어기제를 떠올리게 한다. B씨는 누가 봐도 괜찮기 어려운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괜찮다는 대답을 이어갔다. 이는 진정으로 괜찮았다기보다 너무 강렬하게 ‘괜찮고 싶었던’ 마음을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웠던 당시 상황이 오히려 B씨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을 끌어낸 것이다. 실제로 B씨는 검찰 진술에서 “강간 피해자가 되는 것이 무서웠다. 피해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괜찮다’라고 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미성년자가, 만취한 채, 한차례 성폭행을 당한 뒤 ‘괜찮다’라고 말하는데, A씨는 이를 곧이 받아들였단 말인가. 대법원은 성폭행 직후 알몸으로 있는 피해자를 구조하려는 조치 없이 성행위 동의를 구한 것은 그 자체로 모순되고 이례적이라며, 하급심이 B씨의 괜찮다는 말을 성관계 동으로 본 것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6일, 대법원 2부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된 육군 하사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한 원심을 엎고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B양의 괜찮다는 말을 성관계 동의로 보긴 어려우며, 당시의 ‘괜찮다’는 형식적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B양이 A씨를 고소한 경위에도 특별히 의심할 사정은 없다고 덧붙였다.


피해자답지 않아도...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격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라고도 강조했다. 이 문장의 의미하는 바는 크다.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가 모두 다를 수 있고, 그 모두가 피해자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은 그간의 다소 일률적이었던, ‘피해자다운 피해자’ 사고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두려움에 떨며 숨어 지내지 않아도, 자신이 입은 피해를 소리 내 외쳐도, 혹여 너무 고통스러워서 ‘괜찮다’라고 말했을지라도. 그들이 피해자로 인정되고, 가해자는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 ‘피해자답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이는 많은 피해자를 구제하고, 동시에 가해자를 처벌할, 좋은 변화임을 확신한다.

1,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야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뜻이리라.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고 적고 싶다. 더는 ‘피해자답지 않아도’, 혼자가 아닐 수 있겠다고. 그러니 앞으로는, 목소리를 내도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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