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커_박경희 기자]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10일 문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의 핵심은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며 사실상 수락 했지만, 그 ‘여건’이란 것이 쉽지 만들어질 수 있을까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문 대통령의 방북 성사에 따라 한반도 운명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문 대통령에 평양 방문 거듭 제안한 김여정

김정은 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방남한 김여정 부부장은 2박 3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어제(11일) 늦게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정은의 친서를 직접 문 대통령에게 전달한 김여정은 남한에 머무는 동안 문 대통령에게 ‘평양에 오시라’는 말을 거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그래픽_황규성 그래픽 전문기자

10일 오찬의 자리에서 문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11일에도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또한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주재한 만찬에서도 “평양에서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했으며, 북한으로 떠나기 전 문 대통령 내외를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도 “꼭 평양을 찾아오시라”고 말했다. 김여정 뿐만 아니라 북한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문 대통령에게 “다시 만날 희망을 안고 돌아간다”며 방북 요청을 했다.

이처럼 김여정 부부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거듭 평양을 방문해 달라고 말한 것에 대해 우리 측은 ‘의도된 메시지’로 판단하고 있다. 2000년, 2007년에 이은 3차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김정은 위원장이 강하게 희망하고 있다는 뜻으로 여긴 것이다.

통일부도 ‘북한 고위급 대표단 방남 설명자료’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북한의 의지가 매우 강하며 필요한 경우 전례 없는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한 외교소식통은 김정은은 국면전환을 위해 사실상 ‘다걸기’에 나섰다고 말하기도 했다.

◆ 美 강경해 방북 여건 마련하기 쉽지 않을 듯

김여정 부부장의 방북 제안에 문 대통령은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말했지만, 그 여건 마련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의 관계에는 우리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전 세계와의 관계들이 얽혀 있는데다 무엇보다 미국의 입장이 강경하고, 대북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이지만, 우리 정부는 남북 대화가 비핵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펜스 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을 계기로 방한하는 내내 대북 압박의 기조를 보였다. 또 평창 이후 다양한 옵션을 동원한 최대한의 대북압박을 해 결국 북한을 무릎 꿇리겠다는 점 등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이르면 이달 중에 ‘포괄적 해상차단’을 포함한 강력한 대북 제재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미 재무부가 지난해 10월 북한 유조선 예성강 1호가 바다에서 다른 선박으로부터 원유를 옮겨싣는 장면이 담긴 위성사진을 공개했고, 일본 초계기는 도미니카공화국 깃발을 단 선박이 동중국해에서 예성강 1호와 맞댄 상태에서 화물을 옮기는 장면을 포착하는 등 유엔 안보리 결의에도 불구하고 밀거래가 끊이지 않고 있어서 내놓은 카드이다.

해상차단은 군사적 행동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제재로, 물자 수송을 거의 배에 의존하는 북한에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 미국이 대북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한미 공조를 공고히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문 대통령의 방북도 쉽게 결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문 대통령은 10일 평창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를 펜스 부통령과 함께 관람하며 북한 인사들과의 면담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의논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만간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며 한미 공조에 기반을 둔 향후 대응책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 문 대통령의 선택은 우선 ‘대북 특사’ 검토할 듯

문 대통령은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해 북·미 중재외교를 꾀했었다. 물론 펜스 부통령이 끝까지 북한 고위급 인사들을 피하는 바람에 문 대통령의 뜻이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여동생인 김여정 부부장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요청한 만큼 이를 중재외교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즉 청와대는 현재의 국제정세를 살펴봤을 때 한반도 갈등의 핵심인 북·미간의 대화 분위기가 형성돼야 남북 정상도 의미있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우선 북한을 설득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위원장이 여동생을 특사로 보낸 만큼 우리 정부도 고위급 특사를 보내 김위원장으로부터 핵 동결 의사라도 받아낼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한반도 전문가들도 미국의 입장처럼 북한의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 해왔다고 해서 한미공조와 대북 압박을 완화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하고 있다. 한동대 박원곤 교수는 “북한의 전향적 태도는 제재와 압박을 통해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제재·압박이 동력을 잃으면 남북대화의 성공가능성도 크지 않다”며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한미공조를 통한 대북 제재의 고삐를 늦추는 길을 택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종원 와세대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는 11일 마이니치 신문을 통해 “김여정에 의해 친서를 전달하는 형태로 방북 요청이 이뤄졌다는 것은 대화를 향한 북한의 강한 의사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러나 북한의 시선은 자신들에게 강경하게 대웅하는 미국에 가 있다. 제재 해제를 위해 우선 한국을 흔들고, 그 후에 미국을 움직이려는 것이 북한의 의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반도 전문가들의 조언을 참고해 볼 때 대북 제재 해제 또는 완화를 위해 한국을 이용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시점에서 김정은의 남북 정상회담 요청에 대해 문 대통령은 어떤 식으로 응답할지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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