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보증기금 통해 5000만원 보증 받다-

-기술보증기금 통해 5000만원 보증 받다-
나는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다. 숱한 고민과 밤잠을 자지 못하고 결정 내렸던 IT분야로의 전환의 첫 발은 이렇듯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지금생각에서 그 때 남모르게 울었는지 아니면 하늘을 향해 소리만 지르고 말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길을 또 어떻게 찾을 것인가. 나에게 주어진 과제가 되었지만 다행히 나는 엉뚱한 면이 많았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나는 집에서 신문을 보다고 태블릿PC의 지면광고를 보게 됐다. 주말이어서 저녁은 일찍 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나마 개발자와 연락이 됐고, 개발자가 안심시킨 관계로 비교적 평안한 주말을 보내게 됐다. 그 때 일주일동안 보지 못한 신문을 한꺼번에 보는 습관이 있었으며, 그 신문을 보는 중에 이제 신문사는 사양길을 걸은 지 오래됐다는 생각과 디지털신문(PDF신문)의 거래는 전무(全無)하다는 생각에 미치게 됐다. 이 생각은 내가 신문업계에 종사하기 때문에 알고 있는 사실이며, 이미 1년여 전 뉴욕타임즈가 종이신문 발행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종이신문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국내에도 조선·중앙·동아일보를 비롯하여 유명 신문이 존재하지만 디지털시대를 맞았고, 태블릿이 일반화되면서 더 심각한 재정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변치 않는다. 여담이지만 조·중·동이 종합편성프로그램까지 손을 뻗치게 된데 는 이 문제와 별개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PDF신문의 판매량은 집계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다. 나는 이것이 기회의 한편으로 PDF신문을 통한 엄청난 사업의 기회를 보게 됐다. 단지 9단21㎝ 크기의 태블릿 광고를 통해서 말이다.
지금은 부크스토리를 추진하고 있지만 부크스토리는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좋은 에너지를 전파하는 기능을 할 뿐 수익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해서 이번에 만들게 되는 이 개발아이디어는 ‘부크스토어’라는 이름으로 직접적인 수익창출이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부크스토어라는 이름도 처음부터 나온 것은 아니며, 디지털식혜, 풀스토어 등으로 이름 짓다가 ‘부크’라는 브랜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부크스토어라고 이름 짓게 되었다. ‘디지털식혜’라는 이름은 지식 ‘식’자와 지혜 ‘혜’자의 합성어로 샤워하다가 문득 생각난 이름이었다.

결과적으로 ‘부크스토어’는 리웍스미디어를 잠시나만 연명할 수 있는 5000만원의 아이디어가 되었다. 부크스토어가 5000만원에 팔렸다는 것은 물론 아니며, 이 아이디어를 상세한 사업계획서가 기술보증기금을 통해 5000만원 보증이 가능하게 됐다는 말이다.

리웍스미디어는 이미 2012년 9월 이후 단 한 푼의 수익을 발생시키지 못했으며, 그런 상태에서 직원 급여를 밀릴 수는 없어 계속 지급하다보니 나에게 주어진 마이너스통장은 바닥을 보이게 되는 힘겨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나는 매출이 없으면 보증이 어렵다는 기보 담당 팀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찾아가 사정을 했으며, 8000만원 신청에 5000만원의 보증이 가능하게 됐다.

당시 8000만원이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기보에서 8000만 원 이상이 대출되어야 벤처기업으로써 인정을 받을 수 있고, 향후 개발된 상품의 마케팅을 위해 광고를 하게 되면, TV나 라디오 광고에 한해 70%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내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5~6개월 정도를 운용할 수 있는 안정자금은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써 내 빚은 8000만원(서울신용보증기금의 3000만원은 2012년 9월에 이미 지원받았다.)이며, 개인통장의 3600만원 마이너스 통장과 이미 기 투입한 사업자금 3000만 원 등으로 총 마이너스가 1억 원을 넘게 되었다.(이 문제 때문에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내 ‘남현주’가 눈물을 흘리게 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된 것도 나로서는 안타깝지 않을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아내는 나보다 더 대담한 사람이다. 사업을 한다면 나보다 아내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을 정도다. 그런 사람이 눈물을 보였다는 것은 가장인 나로서 무척 힘든 일이었다.)

IT분야에는 불나방이 많다. ‘한탕’을 노리는 사람들이며, 한 방에 인생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이 분야로 들어오면서 알게 됐다. 대부분 20~30대이며, 젊기에 가능한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고,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 한탕을 꿈꾸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런데도 내가 이 길로 들어선 것은, 나의 머리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는 충분히 실현가능한 것으로 스스로 도취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상황이며, 단 한 푼의 수익도 발생하지 못한 지금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적어도 지금까지는…)

5000만원을 받게 한 아이디어는 ‘부크스토어’덕분이다. 하지만 난 부크스토리 마저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사업계획서상 해외로 사업영역을 넓히는 년 9000억 원의 수익도 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이것은 계획서 상일뿐 실제로는 많은 변수가 존재했다. 이런 변수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리스크를 감당할 만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나에게는 빚밖에 남지 않았다.

▲(주)리웍스미디어그룹 신대성 대표이사
나는 나의 글이 ‘바람’이었으면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글이 ‘음악’이거나 ‘노래’이기를 바란다. 오랫동안 뭇사람의 가슴에 머물러 있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난 나의 글이 ‘바람’이기를 원하는 것은 오랜 글쓰기의 습관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문기사는 지나간 글에 대해 추억을 살릴 수는 있지만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울먹임은 갖기 어렵다. 바람은 흐른다. 시대를 풍미했던 기사도 흐른다. 그래서 바람은 추억이 되고, 지나간 추억은 좋았건 나빴건 희미하다.
나는 나의 글에서 바람소리를 들었으면 한다. 바람소리는 때로 산들바람처럼 시원하지만, 격랑의 폭풍우처럼 거세기도 하다. 들녘에 부는 바람은 마른 풀잎사이를 지나며 야릇한 소리를 만든다. 바람은 지나고 다시 오지 않는다. 시대의 글이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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