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근호의 희노애락

조합장이 앓는 ‘조합병’의 병증

하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둘, 사람에 대한 실망감, 마음에 상처를 입다.
셋, 늘 마음이 안절부절 하다.
넷, 내 답답한 속 누가 아나.
다섯, 인내심 한계 시험…하루하루 산다.
여섯, 사업성 분석결과로 남모르게 고민한다.

▲ 육근호 대표는 1987년부터 주택정비사업에 몸담아 온 명실공히 정비사업 1세대이다. 87년 하계2재개발을 시작으로 93년 조합장에 역임했으며, 현재 정비기획원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그 밖에 총 700여회의 총회, 설명회, 기획운영을 하 바 있는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다.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 때문인지 일어날 시간이 되었으나 눈꺼풀이 열리지 않고 몸은 천근이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까칠한 얼굴이 낯설어 흠칫 놀란다.

억지로 식탁에 앉았으나 입안이 깔깔한 것이 음식 맛을 느끼지 못한다.

같이 식사를 하는 가족이 대화를 청하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엉뚱한 대답을 하여 핀잔을 듣는 일이 잦다.

소화제를 챙겨 때때로 복용을 하지만 늘 뱃속이 더부룩하고 기력이 점점 떨어지며 만사가 귀찮기만 하다.

조합원과 비슷한 사람이 지나가면 길을 비켜간다.

휴일에도 집에 있으면 공연히 마음이 불안하여 아예 조합사무소에 나와 앉는다.

조합장은 대부분 설명하기 어려운 갖가지 증세로 인하여 본인도 모르게 점점 심신이 피폐해진다.

조합장 체질이라 하여 강력한 추진력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탁월한 설득력을 구사하며 활발하게 조합을 운영하는 조합장도 있지만 그 역시 속내가 편안할 리 없다.

조합장은 조합병이라 일컫는 여러 가지 병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만약 조합장직을 내어 놓아도 긴 세월 그 후유증이 나타나 괴로움을 겪게 된다.

조합병은 전염력 또한 강하여 대의원이나 일반 조합원 할 것 없이 조합 일에 나서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조합병 환자가 되기도 한다.

조합병이 전염되면 피해의식으로 늘 마음이 불안하여 공연히 조합을 기웃거리게 되며, 결국 조합의 직제로 정한바 없는 “상근 대의원” 또는 “상근 조합원”이 나타난다.

따라서 정작 정관에 정하고 있는 상근 임직원은 이들이 날이면 날마다 조합사무소를 찾아와 참견을 하며 조합관련서류를 복사하여 달라는 등 성가시게 하기 때문에 조합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화병까지 겹치게 된다.

조합병의 병증은 어떠하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정비사업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던 초기단계에는 모두들 막연하지만 기대감에 부풀어 협조적인 자세로 두 팔을 걷어 부친다.

이미 기본계획이 고시되고 명칭도 멋들어진 ‘뉴타운 사업’이 바람을 몰고 와 주택가격까지 들썩이니 일부 임대수입에 의존하거나 신축주택의 소유자를 제외하고는 반대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와 설계자를 선정할 시기가 되면 이상하게도 귓속말을 나누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서로 경계하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의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여러 협력업체의 관계자가 알음알음 만나기를 청하게 되니 서로의 마음에 벽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마음의 벽은 서로 이해를 같이 하게 될 때 쉽게 허물어져 언제 그랬냐는 듯 돈독한 인간관계로 전환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감정의 골을 깊게 하여 상호 반목과 대립을 일삼게 된다.

시종일관 되풀이 되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이전투구 속에서 조합장이 가장 경계하여야 할 일은 눈앞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마음을 바꾼 내부의 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군이 총대를 거꾸로 멘다.’는 말이 공연히 나왔겠는가.

그만큼 조합장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믿어서도 아니 된다는 말이다.

둘째, 사람에 대한 실망감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창립총회 시 조합장후보는 거의 단독으로 출마하게 되나 정비사업이 어려워질수록 다수후보가 등록하는 추세이니 일반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창립총회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단독출마 또는 경선의 경우 공히 조합장후보의 곁에서 이것저것 거들어주는 조합원이 눈에 띤다.

조합장후보는 각자가 출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며 나름대로의 소명의식이 없으면 나서기가 쉽지 않은 것이 조합장 직이다.

조합장후보로 나서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곁에서 거들어주는 주변 인물들의 권유와 후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은 크고 작은 다툼으로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 있을 때 심지어 몸으로 막아서기까지 하니 더없이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그토록 적극적으로 감싸주고 도와주던 조합원이 모종의 청탁을 하였을 경우 조합장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조합장은 정관규정에 따라 공식기구에서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조합의 대표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조합장이 청탁에 응할 수 있으며, 만약 조합장이 무리를 하여 하지 않아야 될 일에 나서게 되면 그 부담과 후유증은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창립총회에서 조합장후보로 나서게 된 추진위원장이 시름없이 넋두리를 한다.

“그동안 고맙게 도와주는 조합원이 여럿이기에 인덕이 있나 하였더니 총무이사를 시켜 달라 압박하는 자가 다섯이나 된답니다.”

아직 조합장으로 당선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여러 가지 청탁을 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았던지 초췌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이미 사람에 대한 실망감으로 조합병이 깊다.

셋째, 늘 마음이 불안하다.

조합을 작은 정치판이라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합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정치판보다 더 살벌하며 타협의 여지가 없다.

사업진행과정에서 어떤 일이 발단이 되어 감정이 상하게 되면 서로 못 할 일이 없는 곳이 조합이다.

다정했던 이웃이 철천지원수처럼 험악한 사이가 되어 서로 헐뜯는 일이 다반사이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음 둘 데가 없다.

조합병에 전염 된 조합원들은 필요에 따라 뭉치고 갈라서기를 거듭하며 목적한 바를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나름대로 비밀스러운 만남이지만 조합장직에 있으면 알고자 하지 않아도 조합원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가 꼭 귀띔 해주는 조합원이 있다.

조합장이 가장 곤혹스러울 때는 공식기구의 운영과정에서 미리 모의를 한 징후가 나타날 때이다.

대의원회를 하기 전 미리 일부의 대의원들이 모여 입을 맞추는 일명 ‘다방 대의원회의’를 거치게 되면 대의원회의를 해 봐야 그들의 의도대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다.

조합을 위해서 분명 최선의 결과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숫자에 밀려 결의 된 엉뚱한 결과를 선포하며 의사봉을 두드려야 하는 조합장의 심정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남들이 다 쉬는 휴일에도 또 어디선가 삼삼오오 모여 일을 꾸미는 것 같아 공연히 불안해지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조합사무소에 나와 하릴없이 앉아있게 된다.

넷째, 답답한 마음을 누가 알랴.

정비 사업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으며, 시간이 지나야 해결된다는 말도 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의 상당부분이 합리적으로 개정되었다 하나 급변하는 정책과 제도적 걸림돌로 정비사업은 늘 질척거리며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흔히들 구청마다 관계법령의 적용과 업무처리방식의 다름으로 인·허가과정 또한 명쾌하지 않은 듯하다.

또한 각종 심의과정에 여러 가지 이유로 고무줄 늘어지듯 시일이 경과하니 조합장은 속이 탈 수밖에 없다.

사업이 하루라도 빨리 진행되기를 고대하는 조합원들은 인허가가 더딘 것만을 내세워 조합장을 질책하며 지연사유를 묻고 해결책을 내어놓으라 하지만 딱히 답변으로 대신 할 결과가 없으니 그저 무능한 조합장이 될 뿐이다.

행정당국의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니지만 차일피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으로 가슴에 울분이 쌓이게 되며, 설상가상으로 공공시설의 설치 등의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대책 없이 세월만 흘러갈 때에는 조합장의 답답증이 극에 달한다.

행정당국이 인허가권자라는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조합을 압박하는 사례는 어느 정비사업구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합원은 답을 내어 놓으라 하고 행정당국은 급할 것이 없으니 속이 타들어가는 사람은 조합장뿐이다.

다섯째,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조합장은 그 지역에서 나름 무게 있는 역할을 하여 왔으며, 동네의 중심인물로 존경 받아왔기 때문에 피선된 것이 아니겠는가.

평생 남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었으나 조합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듣기 거북하고 듣는 순간 속이 뒤틀리는 비방 일변도의 유언비어로 인하여 마음을 상하게 된다.

처음에는 오해를 풀어보고자 해명을 하여 보기도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내용이 부풀려져 마치 사실인양 조합원사이에 회자되니 버선목을 까 보이듯 일일이 사실 확인을 하기도 어려우며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호소할 곳 또한 없다.

조합사무소는 조합의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며 조합은 통상사무 외에 협력업체등을 통하여 최선의 시행방법을 택하여 사업에 반영하여야 하므로 조합사무소에서는 각종 회의가 잦다.

그러나 상근 임직원들이 조합의 현안문제를 놓고 심사숙고하여야 하는 근무공간에 조합원이 들이닥쳐 이것저것 요구를 하게 되니 하루 종일 그들과의 대화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그렇다고 불편한 기색을 나타내면 곧바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자고 달려들기 일쑤이고 심한 경우 집기를 내동댕이치기까지 하나 그들이 조합원인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마음속에 참을 ‘忍’ 자를 그리며 순간순간의 울화를 다스리지만 사람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종종 인사사고가 나기도 한다.

일반 상거래라면 천금이 남는다 하여도 거래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들이 조합원인 이상 조합장은 하루하루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섯째, 사업성에 대한 분석결과를 안고 남모르는 고민을 하게 된다.

조합원의 부담과 관련된 사항은 사업시행인가를 받은 후 관리처분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시화된다. 조합장은 사업초기부터 주변지역의 아파트가격에 대한 변동추이를 살피며 당시 관리처분계획이 인가된 타 사업지의 공사비 등을 대입하여 사업성을 분석해보게 된다.

물론 조합원들이 하나같이 늘 내어 놓으라 하는 부담금의 수치를 알려주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사업시행주체인 조합의 수장으로써 조합원들의 부담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 정비사업조합의 분위기는 사업성이 높게 형성되는 구역과 열악한 사업여건으로 조합원이 많은 부담을 안아야 하는 구역으로 나뉘어 양극화되고 있다.

사업성이 좋은 사업구역의 경우 그 누구든지 조합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성토당하는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조합장은 부담 없이 사업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분양수입금으로 사업이익의 크기를 달리하는 정비사업의 특성 상 일반분양분이 거의 없는 사업구역의 조합장은 걱정하는 마음이 크다.

거기다가 어떻게 하던 조합장을 끌어 내리려는 반대파들은 수시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유인물을 날리며, 조합원분양가를 싸게 하고 조합원의 재산평가를 높여야 한다는 둥 오도하고 있으니 조합장의 고민은 날로 깊어질 수밖에 없다.

동네를 개발하고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위원회사무소에 집기를 들이던 날 고사 상에는 돼지머리가 지폐를 입에 물고 웃고 있었다.

그러나 막걸리 한잔에 불그레한 얼굴로 새 아파트에 입주할 희망에 젖어있던 조합원은 점점 초심을 잃어가고 있으며, 남은 인생을 바쳐 동네발전에 헌신하고자 어려운 결심을 하였던 조합장은 꼭 해내겠다는 사업에 대한 의지와 소신 대신 가슴에 오기를 품는다. 그렇다면 오기도 조합병의 하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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