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과잉 시대 생존 전략, 석유화학에서 친환경 고부가소재 중심 체질개선 박차

LG화학(신학철 사장)이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의 비스페놀A(BPA) 사업부를 매각하기로 결정하면서, 석유화학 업계의 지각변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번 매각은 단순한 자산 유동화나 포트폴리오 슬리밍 차원을 넘어, 전통 범용 석유화학에서 친환경 고부가소재 중심으로의 체질개선을 본격화하는 ‘선언적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구조적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석유화학 산업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LG화학의 리밸런싱 전략이 향후 업계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알짜’ BPA 매각… 유동화 아닌 구조개편의 방아쇠
LG화학은 7월 초 BPA 사업부 매각을 공식화하고, 매각주관사로 삼정KPMG를 선정해 전략적 투자자(SI)와 재무적 투자자(FI)를 대상으로 비공개 IR을 진행 중이다. BPA는 LG화학 석유화학 포트폴리오 내에서 가장 안정적인 캐시플로우를 창출하는 사업부로, 그간 구조조정의 ‘성역’으로 여겨져 왔다.
여수와 대산 두 곳에서 연간 총 50만 톤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국내 생산량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2024년 기준 매출은 약 1조6000억원, EBITDA는 3100억원 수준, EBITDA 마진은 19% 이상으로 집계된다. 특히 캡티브 수요처 비중이 높고 중국 수출 의존도를 30%를 이하로 낮추는 한편, 동남아·인도·유럽 등으로 수출 다변화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구조적 안정성이 높다는 평가다.
‘왜 지금, 왜 BPA인가’... LG화학의 전략적 셀다운 맥락
시장의 관심은 “왜 LG화학이 지금, 그것도 수익성이 가장 뛰어난 BPA를 파느냐”에 모인다. 이는 단순한 유동성 확보가 아니라, LG화학이 석유화학 전체를 ‘성장 불가능 영역’으로 간주하고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섰다는 판단에 가깝다.

BPA는 범용 석유화학 제품 중에서도 전자·건축·자동차 소재 등 다양한 산업에 쓰이는 기초 원료로, 수요가 안정적이고 경쟁사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은 제품군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중국·중동의 저가 공세와 글로벌 수요 둔화라는 거대한 구조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범용군에 가까운 고마진 제품’이라는 점에서, LG화학 내부적으로는 기회비용이 가장 높은 사업부로 판단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LG화학은 2023년 이후 석유화학 부문에서 총 1조5000억원 규모의 사업 정리를 단행했다. 대산·여수의 스티렌모노머(SM) 라인, 에틸렌글리콜(EG) 라인, 나주 알코올 설비 등을 단계적으로 셧다운하고, 그 공급을 타 화학사로부터 수급받는 구조로 전환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 BPA 매각 역시 ‘정리 가능한 고마진 자산’의 마지막 고리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결국 BPA 매각은 LG화학이 지금까지의 석유화학 중심 구조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 시점에서 알짜 자산을 매각한다는 것은, ‘살리기’보다 ‘다시 짓기’를 선택한 셈이다.
구조적 위기 빠진 석유화학… ‘버티기’는 더 이상 전략이 아니다
LG화학은 2018년부터 약 2조6000억원을 투입해 여수산단에 제2 나프타분해설비(NCC) 및 고부가 폴리올레핀(PO) 생산설비를 구축했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 석유화학 업계는 수요 회복과 원가 안정성을 바탕으로 또 한 번의 사이클 상승을 기대하던 시기였다. 특히 중국의 고속 성장세와 수입 수요에 의존한 구조에 기대어, 국내 메이저 석화사들은 공격적으로 증설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2021년 이후 중국 정부가 자국 내 에틸렌 및 프로필렌 자급률 100% 달성을 목표로 대규모 NCC·PDH 설비를 신증설하면서 시장 판도가 급변했다. 실제로 중국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2019년 2700만톤에서 2024년 기준 5700만톤을 넘어섰고, 2028년까지 추가로 2200만톤이 증설될 계획이다. 국내 전체 생산능력(약 1300만톤)의 6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런 환경에서 LG화학은 2023년 제2 NCC 가동을 중단하고, 스티렌모노머(SM), 에틸렌글리콜(EG), 나주 알코올 설비 등 원가 역마진이 심화된 생산라인을 순차적으로 철수했다. 구조조정된 자산 가치는 약 1조5000억원으로 추산된다. 단기 실적 방어가 아닌, 지속불가능한 구조에 대한 전략적 철수 결정이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과 중동은 원재료, 전력, 인건비, 설비 감가 측면에서 한국보다 20~30% 원가경쟁력이 높다”며 “지금은 생산하면 손해가 나는 구조”라고 말했다. LG화학 내부에서도 “더는 버티기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이미 자리 잡았다.
해답은 고부가·친환경 중심의 전략 전환
LG화학은 기존 석유화학 중심 체제를 탈피하기 위해 ‘투트랙 전략’을 가동 중이다. 첫 번째는 원가 구조 혁신이다. 현재 전체 석유화학 제조원가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원재료비를 줄이기 위해, 국내 정유사 및 해외 석화사들과의 공동 원료조달(JV 또는 장기 트레이딩 계약)을 논의 중이다.
특히 LG화학은 정유사와의 연계 협업이 설비 통합보다 원가 절감 효과가 크다는 점에 주목한다. “설비 고정비는 전체 원가의 10% 수준에 불과해, NCC 통합 가동 시 감축 여지가 제한적”이라는 것이 LG 측의 판단이다.
두 번째 축은 중국과 기술 격차가 존재하는 고부가·친환경 제품군으로의 집중 전환이다. LG화학은 현재 △차세대 PVC(고내열·고강성) △ABS(가전·자동차용 프리미엄 등급) △SAP(고흡수성수지) △SBC(합성고무) 등 기술장벽이 높은 제품의 매출 비중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친환경 부문에서도 △PCR(재활용 플라스틱) △HVO(바이오 오일) △POE(태양광 패널용 엘라스토머)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등 신시장 대응 소재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유럽(EU)과 미국의 환경규제(EPR, 탄소국경세 등) 강화 기조에 맞춰, 해당 지역 수출 비중을 확대함으로써 규제 회피형 포지셔닝도 병행하고 있다.
다만, 친환경 사업은 시장 성숙까지 최소 2~3년 이상 소요될 전망이다. 관련 인프라, 고객사 전환 비용, 단가 수용성 등에서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LG화학은 “지금 하지 않으면 5년 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절박감으로 사업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LG화학, 석유화학 대수술의 ‘트리거’ 될 수도
LG화학의 BPA 매각은 단순히 개별 기업의 구조조정이 아닌, 국내 석유화학 산업 전반에 ‘지각변동’을 촉발한 트리거(Trigger)로 작용하고 있다. 업계 1위 사업자조차 ‘수익성 있는 범용 제품’까지 과감히 포기하는 모습을 통해, ‘생산하면 손해’인 구조적 위기 상황이 현실임을 공식화한 셈이다.
실제 국내 주요 NCC 기업(롯데케미칼, 한화토탈에너지스, 여천NCC, SK지오센트릭 등)의 평균 가동률은 2024년 1분기 기준 76.8% 수준으로, 손익분기점(BEP)인 85%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곧 전체 산업이 구조적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국면에 진입했다는 의미다.
업계는 이제 LG화학을 시작으로 후속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대산·여수·울산 등 국내 주요 석유화학 단지를 중심으로 설비 통폐합, JV형 공동운영, 해외 원료 조달 연합체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기업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만큼, 정부의 중재와 제도적 뒷받침이 선결 과제로 부각된다.
이와 관련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석유화학산업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해당 법안은 △산단 구조조정 인센티브 △친환경 고부가 R&D 지원 △공정거래·금융 규제 완화 등 전방위 대책을 포함할 전망이다. 법안이 통과되면 기업 간 공동 투자·운영에 대한 제도적 장벽이 일부 해소되면서, 국내 석유화학 밸류체인 재편 작업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한 석유화학 업계 임원은 “LG화학의 구조조정은 단기적인 수익성 악화 방어가 아닌, 장기적으로 생존 가능한 산업구조를 다시 설계하려는 선언적 행동”이라며 “이 변화의 속도와 방향성에서 다른 기업들과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석유화학 이후의 LG화학, ‘Post-Chemical 시대’의 포지셔닝
LG화학이 시장에 내놓은 BPA 사업부는 국내 1위 생산능력과 탄탄한 현금흐름 구조를 갖춘 정상급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미래 전략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감히 정리 대상에 포함됐다.
이는 LG화학이 선택한 리밸런싱 전략이 단순한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이 아니라, ‘성장의 좌표 자체를 바꾸는 재설계’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현재 LG화학의 방향성은 뚜렷하다, 성장은 배터리 소재, 바이오, 친환경 기술 중심의 신사업에서, 수익은 기존 화학 부문 내 고부가·ESG 대응 제품에서 창출한다.
이 구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되면 LG화학은 전통 석유화학에서 배터리·바이오·친환경 소재 기업으로의 전환에 가장 먼저 안착한 국내 대표 사례가 될 것이다.
이제 LG화학이 그리고 있는 ‘Post-Chemical 시대의 성장 곡선’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선도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치르는 산업 대전환의 필연적 경로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