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극복 희망을 준 영웅의 ‘눈물’, 스포츠가 변화시킨 사회, 원만한 해결로 끝나야…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멈춰버렸던 1997년 12월 3일. 그리고 한국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1년 8월 23일이 되어서야 IMF 체제를 끝내게 된다. 타국에 비하면 굉장히 빨리 극복한 것이지만, 외환위기 시절의 후유증은 25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 주도층인 3040 세대에게는 그 시절의 아픔이 아직도 마음 한켠에 저리게 남아있다. 그래서 더욱 ‘경제 위기’라는 단어에 몸서리칠지도...[본문 중에서]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멈춰버렸던 1997년 12월 3일. 그리고 한국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1년 8월 23일이 되어서야 IMF 체제를 끝내게 된다. 타국에 비하면 굉장히 빨리 극복한 것이지만, 외환위기 시절의 후유증은 25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 주도층인 3040 세대에게는 그 시절의 아픔이 아직도 마음 한켠에 저리게 남아있다. 그래서 더욱 ‘경제 위기’라는 단어에 몸서리칠지도...[본문 중에서]

국민 영웅박세리가 울었다. 최근 박세리가 이사장으로 있는 박세리희망재단이 박세리의 부친 박준철 씨를 사문서 위조 및 위조 사문서 행사 혐의로 고소한 사건이 그 원인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9월 대전 유성경찰서에 고소장이 제출된 이후, 지난 611일 언론을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박세리 부친은 국제골프학교를 설립하는 업체로부터 참여 제안을 받은 후, 재단 법인 도장을 몰래 제작해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박세리희망재단은 18, "사문서위조 및 위조 사문서 행사 고소 사안과 관련하여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리기 위해 기자회견을 개최한다"고 밝혔고 결국 이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다. 박세리는 기자의 질문에 "이 일로 부녀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냐"고 물었을 때, "전혀 무관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이런 문제들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가족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왔지만, 아버지의 채무 문제는 하나를 해결하면 마치 줄이라도 서 있었던 것처럼 다음 채무 문제가 생기는 것의 반복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는 아버지와 연락하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박세리는 본인이 먼저 아버지를 고소했다고 전했다.

또한,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가족, 그중에서도 아버지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서게 된 것은 박세리희망재단의 일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박 이사장은 "재단에서 주니어 대회도 열고, 유망주 육성 및 후원도 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제가 선수 생활을 하며 '세리 키즈' 후배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그 후배들을 보면서 저도 또 좋은 선수들을 키워내고 희망을 주겠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하며 재단을 지킴과 동시에 인재 육성 사업에 차질이 없을 것임을 내비쳤다.

나와 관심이 같은 사람이 본 뉴스

기자회견 내용을 살펴보면, 그녀는 가족을 우선시하여 그동안 아버지와의 불화를 감춰왔지만, 본인이 영웅으로서 해야 할 역할, 즉 후학양성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자, 공과 사의 구분을 위해 고소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가끔, 사회의 유명인들 중에는 부여해 준 지위에 걸맞지 않게 타락하거나 쓸데없는 잡음을 일으켜 그 위상을 잃은 영웅들의 사례가 많았다. 그런 존재일수록 어떤 불협화음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더욱 관심을 가지는 법이다. 누군가는 한 개인에게 너무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확인되지 않는 소문으로 확산하지 말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들의 운명이다. 그들이 사회에 주었던 정신,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변화한 사회, 단순히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사회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나의 일과 무관하지 않기에


맨발 투혼, IMF로 희망 잃은 한국 사회에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골프 여왕


희망의 여왕, 박세리는 1977928, 대한민국 대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에 재능을 보였고, 중학생 시절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박세리의 아버지인 박준철 씨는 딸의 골프 재능을 발견하고, 그녀를 골프 선수로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세리는 이후 본격적으로 골프를 배웠으며, 1996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 데뷔했다.

유투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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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세리는 1998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 참가하였으며, 한국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레전드 경기, 그 해 US 여자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LPGA 투어에서 총 25승을 거두었으며, 2007년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박세리는 골프 선수로서 탁월한 경기력과 투혼을 보여주며 많은 팬에게 사랑받았다.

1997년까지, 매년 엄청난 경제성장을 해왔던 한국은 돌연 그해 겨울,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하며 4년 가까운 경제적 암흑기에 빠진다. 영원할 줄 알았던 경제성장, 벼락같은 소식에 수많은 사람이 절망했고 웃음은 사라졌다. 직장을 잃은 사람, 거액의 빚을 진 사람, 갈 곳을 잃은 사람들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유투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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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시점에 박세리는 나타났고 절망에 빠진 한국 사회에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1998US 여자 오픈에서 보여주었던 맨발 투혼IMF 경제 위기로 인해 절망에 빠져 있던 한국 사회에 한줄기 큰 빛이 되었다. 그 경기에서 박세리는 연못에 빠진 공을 치기 위해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까맣게 탄 종아리와 대비되는 하얀 발은 레전드급 장면으로 기억된다. 당시 우승을 두고 선두와 단 1타 차로 뒤지는 상황이었고, 안정적인 드롭을 하여 벌타를 받고 칠 경우 준우승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지만, 박세리는 드롭을 포기하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날렸다.

유투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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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시 동점이 되어 재연장을 한 끝에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맨발 샷은 단순히 한 선수의 용기 있는 행동을 넘어, IMF로 절망하던 국민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했다. 박세리의 우승은 당시 생중계되었고, 그녀는 박찬호와 함께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199712월 이후, 절망에 빠져있던 대한민국의 온 국민들에게 악전고투 끝에 우승하는 그녀의 모습은 큰 위로와 희망을 선사했다.

당시 대한민국 5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공익광고에 이 장면이 들어갔고, 양희은의 곡 상록수와 함께 엄청난 시너지를 냈다. 그녀의 투혼과 도전 정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박세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이 되었다.


스포츠로 세상을 바꾸다. 인종차별에 경종 울린 육상 영웅 제시 오언스


제시 오언스는 1913년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농부로 일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으며, 어린 시절 오언스는 학교에서 흑인으로서 차별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운동 신경을 가지고 있었고, 학교 육상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진학했다.

유투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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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스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100m, 200m, 멀리뛰기, 4x1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올림픽 성과는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가운데 흑인 선수로서 거둔 성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오언스는 올림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성공은 인종차별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당시 미국은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각한 문제였으며, 흑인들은 많은 사회적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오언스의 성공은 흑인들이 백인과 동등한 능력과 자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의 업적은 미국 내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많은 흑인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오언스는 단순한 육상 영웅이 아니라,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유투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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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스의 영향력은 그가 단순히 뛰어난 육상 선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통해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도구로 삼았다. 그는 올림픽이 끝나고 공화당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미국 사회에 소중한 정식적 자원으로 남아 그의 이름을 딴 제시 오언스 상(Jesse Owens Award)’ 상이 존재한다. 이 상은 그 해 최고의 육상 선수에게 주어지는 미국 육상 최고의 상이다.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흑인 민권 운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스포츠 선수 한 사람의 의지와 정신이 인종차별로 물들어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사회를 움직인 것이다. 이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닐 수 없다.


빌리 진 킹, 오늘날의 여자 테니스의 근간을 만든 선수, 최초의 여성 커밍아웃 선수


빌리 진 킹은 194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테니스에 열정을 보인 그녀는 부모의 지원 아래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18세에 윔블던 여자 단식에서 우승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영화_빌리진 킹: 세기의 대결에서 빌리 진 킹을 연기한 엠마스톤과 스티브 카렐(우)
영화_빌리진 킹: 세기의 대결에서 빌리 진 킹을 연기한 엠마스톤과 스티브 카렐(우)

빌리 진 킹은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녀는 39개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하며, 그중 12개는 단식 타이틀이다. 그녀의 경력은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그녀의 투쟁 정신으로 빛났다

그녀의 나이 30살인 1973, 바비 릭스와 '성 대결' 경기를 펼쳤다. 릭스는 여자 테니스 경기 수준이 떨어진다며, 55세의 나이에도 여자 선수들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며 킹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킹이 거절하자, 릭스는 대타로 마거릿 코트와 맞붙어 세트스코어 2-0으로 가볍게 이기며 큰 화제를 모았다. 사람들의 관심에 흥분한 릭스는 더욱 강한 말로 여자 테니스 선수들을 조롱하며 킹을 자극했고, 결국 대결이 성사, 킹은 릭스를 상대로 완벽한 우승을 달성했다. 이 경기는 테니스에서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며, 여성 대회의 상금 규모가 남성 대회와 동등해지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영화_빌리진 킹: 세기의 대결에서 빌리 진 킹을 연기한 엠마스톤과 스티브 카렐(우)
영화_빌리진 킹: 세기의 대결에서 빌리 진 킹을 연기한 엠마스톤과 스티브 카렐(우)

킹의 성공은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981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며,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킹의 업적은 단순히 스포츠 경기를 넘어,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여성 스포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여성 스포츠 재단을 설립하여 여성 스포츠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더 나은 환경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현재의 WTA 투어의 전신이 되는 '버지니아 슬림 서킷' 창설하고, 초기 WTA의 운영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녀의 노력은 여성들이 스포츠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서 선정한 '세기의 여성들' 중 운동선수 부분에 뽑혔고, LIFE 지에서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복싱을 통해 부조리와 대결한 전설 무하마드 알리’, 흑인민권운동, 사회운동가


격투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전설의 그 이름 무하마드 알리. 그는 1942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캐시어스 클레이였으나, 이슬람교로 개종하며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전거를 도둑맞고 경찰에게 복싱을 배우기 시작하며 운동 경력을 시작했다. 알리는 뛰어난 신체 조건과 빠른 손놀림으로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

알리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프로 복싱에서 활약하며 1964년 소니 리스턴을 꺾고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는 강력한 펀치와 뛰어난 방어 기술로 여러 차례 챔피언 타이틀을 방어하며 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 아웃복싱을 완성한 현대 복싱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의 유명한 '떠다니며 쏜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을 상징한다.

그러나 알리가 유명했던 것은 전설의 복서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알리는 복싱 경력 외에도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 싸운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 징집을 거부하며, "나는 베트콩과 싸우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는 미국 내 인종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알리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복싱 활동을 중단해야 했지만,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무하마드 알리/ 유투브 갈무리
무하마드 알리/ 유투브 갈무리

알리의 사회적 활동은 흑인민권운동과 평화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함께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참여하며, 흑인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알리는 평생 인권과 평화를 위해 싸웠고,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다. 알리는 단순한 복싱 챔피언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인물로 남았고, 한 사람의 전설이 한 사회의 전설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앞장서서 보여준 영웅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무너진 일본의 재기에 희망을 준 축구 선수 호마레 사와


호마레 사와는 197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열정을 보였고, 12세에 일본 여자 축구 리그인 나데시코 리그(Nadeshiko League)의 요미우리 벨레자(Yomiuri Beleza)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인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사와는 뛰어난 기술과 리더십으로 팀의 중심 선수로 성장했다.

FIFA TV 갈무리
FIFA TV 갈무리

사와는 일본 여자 축구 국가대표로서 1993년부터 2015년까지 활약했다. 그녀는 2011FIFA 여자 월드컵에서 일본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사와는 이 대회에서 5골을 기록하며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특히, 결승전에서 미국을 상대로 연장전 후반에 극적인 동점 골을 넣으며 팀을 승부차기로 이끌었고,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호마레 사와가 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FIFA TV 갈무리
호마레 사와가 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FIFA TV 갈무리

2011년 당시 일본의 상황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던 한국과는 또 다른 면에서 최악의 암흑시기였다. 같은 해 3월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까지 발생하며 유례없는 자연 재앙 앞에 절망했던 시기이다. 온 국토가 침울하던 그해 여름, 일본 여자 축구 대표팀은 독일에서 열리는 2011 FIFA 월드컵에 출전하였고 사와의 극적인 활약으로 혈투 끝에 우승하였던 것이다.

사와의 월드컵 우승은 재앙으로 얼룩진 일본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과 희망을 주었다. 많은 사람이 이 승리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얻었고, 일본 사회 전체가 하나로 뭉쳐 재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1998년의 박세리가 그러했듯이, 이 우승은 단순한 스포츠 성과를 넘어, 일본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또한, 사와의 성공은 일본에서 여성 스포츠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어린 소녀들이 호마레 사와와 일본 여자 축구 대표팀을 롤 모델로 삼으며 축구를 포함한 다양한 스포츠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여성 스포츠의 발전과 성평등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와는 은퇴 후에도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에 참여하며, 일본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한 사회가 가장 아플 때 탄생하여 희망을 준 그 정신은 오늘도 꺼지지 않고 사람들의 가슴 한편에서 빛나고 있다.


박세리 정신은 정신적 보물’, ‘공공 재산’, 선한 영향력 훼손되지 않게 갈등 잘 봉합해야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멈춰버렸던 1997123. 그리고 한국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1823일이 되어서야 IMF 체제를 끝내게 된다. 타국에 비하면 굉장히 빨리 극복한 것이지만, 외환위기 시절의 후유증은 25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 주도층인 3040 세대에게는 그 시절의 아픔이 아직도 마음 한켠에 저리게 남아있다. 그래서 더욱 경제 위기라는 단어에 몸서리칠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시절은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공포로 떨던 시기였다.

그러나 마냥 아팠던 것만은 아니다. 외환위기의 교훈으로 2024년 현재의 한국의 경제구조는 그때보다 더욱 치밀하고 단단하게 변화하였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고 홍역을 치른 후에 건강해진다고 했던가?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해 본 적 있는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한가지는 절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기다리고, 인내하고 결국엔 극복하는 것이었다. 1998년 박세리의 US 여자 오픈 경기는 우리 사회에 극복의 정신을 선물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가슴에 깊게 박혀있는 그 장면은 이제 공공 재산이 되었다.

앞으로 그런 위기가 한국 사회에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오지 않게 미리 대비하는 법을 우리 사회는 알고 있다. 그리고 혹여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때보다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다시 박세리 같은 영웅이 나타나 우리에게 희망을 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스포츠를 넘어 사회를 변화시킬 영웅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번 박세리 가족의 논란은 더 커지면 안 된다.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좋은 결말로 끝나야 한다. IMF로 잃었던 경제적인 부는 다시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은 그렇지 않다. 한번 훼손되면 결코 복구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그렇기에 결말이 좋지 않았던 영웅들은 정신의 소멸과 함께 기억에서 사라졌다. 누구보다 강인할 것 같았던, 연못에 공이 빠지기 직전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골프 여제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순한 가족의 불화로 인한 것이었을까? 혹은 진짜로 소중한 어떤 것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의 표현이었을까? 그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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