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 헌액, 봉중근에게 잡힌 '망언 제조기', 후배들 교두보 된 1세대 전설과 미래
![결국 이치로의 명예의 전당 입성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일본 야구가 이룬 성과에 자극받되,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이치로가 그랬듯, 박찬호가 그랬듯,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쿠퍼스타운에 이름을 남길 선수가 나올 것이다. 영원한 전설이 된 이치로가 남긴 이정표는, 한국 야구가 꿈꾸는 새로운 미래의 이정표이기도...[본문 중에서]](https://cdn.newsworker.co.kr/news/photo/202501/365311_381772_051.jpg)
아시아 선수 최초로 MBL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이치로를 바라보는 일본은 축제 분위기이다.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가 22일(한국시각) 발표한 2025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명단에서 이치로 스즈키의 이름이 호명됐다. C.C. 사바시아(86.8%)와 10번의 도전 끝에 입성에 성공한 빌리 와그너(82.5%)와 함께 헌액된 이치로는 394표 중 393표를 얻어 99.746%라는 경이로운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마리아노 리베라(100%)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이치로는 단 1표가 모자란 득표수로 만장일치 입성에는 실패했지만, 오히려 담담한 모습이었다. "한 표가 부족해서 정말 좋았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그의 소감에 아버지 노부유키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겠나. 부족한 정도가 좋다"며 화답했다. 이 특별한 부자의 대화는 그들이 걸어온 야구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시애틀 매리너스는 이치로의 명예의 전당 입성이 발표된 후 그의 등번호 5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는 켄 그리피 주니어(24번), 에드가 마르티네즈(11번), 메이저리그 전체로 지정된 재키 로빈슨(42번)에 이어 구단 역사상 네 번째다. 19시즌 동안 2653경기에서 3089안타를 치며 타율 0.311을 기록한 이치로는 일본프로야구에서 기록한 1278안타를 더해 프로 통산 4367안타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이제 그의 이름은 영원히 MLB 역사에 남게 됐다.
마리아노 리베라 이후 최고 득표율, 부족한 한표, 역사적인 아시아 최초 명예의 전당 입성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은 1936년, 야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뉴욕주 쿠퍼스타운에 세워졌다. 당시는 대공황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시기였다. 쿠퍼스타운이라는 작은 마을에 야구 역사의 성지를 세운 것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려는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야구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전하려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겨있었다.
명예의 전당 입성의 첫 관문은 후보 자격 획득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최소 10시즌 이상을 뛰고 은퇴한 후 5년이 지나야 자격이 주어진다.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 소속 기자들 중 10년 이상을 취재한 기자들만이 투표권을 갖는다. 2015년까지는 은퇴한 기자들도 평생 투표권을 가졌지만, 이후 규정이 개정되며 은퇴 후 10년이 지나면 투표권이 사라지게 됐다. 이 변화는 보수적이고 나이 많은 기자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투표 성향도 달라졌다.
1936년 개관 이래 2025년 현재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뛴 선수는 17,500여 명. 그러나 그중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는 단 142명(0.7%)에 불과하다. 특히 아시아 선수로는 이치로가 최초다. 2014년 노모 히데오가 최초로 후보에 올랐지만, 6표(1.1%)를 얻는 데 그쳤고, 2018년 마쓰이 히데키도 4표를 받고 탈락했다. 그만큼 이치로의 99.7% 득표율은 아시아 야구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이치로가 받은 단 하나의 반대표는 오히려 그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ESPN의 칼럼니스트 버스터 올니는 "이치로에게 투표하지 않은 사람의 결정 근거가 명확한지 지켜보고 싶다"며 이례적으로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뉴욕포스트의 존 헤이먼은 자신의 SNS에 "이치로가 단 1표 차로 만장일치를 놓쳤다. 누군지 나와라, 멍청한 놈"이라며 분노했다. 마리아노 리베라 이후 최고 득표율이라는 기록보다, 오히려 이 한 표의 부재가 이치로의 전설을 더욱 완벽하게 만든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이치로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단순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 아시아 야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특히 오타니 쇼헤이가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치로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시아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도전이 더 이상 '도전'이 아닌 '기회'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3살부터 시작된 스윙 철학, 손웅정 떠오르게 하는 노부유키, 타격 패러다임 전환
"노력하지 않고 무언가를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천재라고 한다면, 저는 절대 천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뭔가를 이루는 사람이 천재라고 한다면, 저는 천재가 맞습니다." 이치로의 이 유명한 말은 3살 때부터 시작된 아버지 노부유키의 특별한 야구 교육에서 비롯됐다. 매일 250개의 스윙, "공을 보는 법"을 가르친 독특한 훈련, 좌타자로 전향시킨 전략적 선택까지. 이치로의 독보적인 타격 스타일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치로만의 타격 매커니즘은 기존의 타격 이론을 완전히 뒤집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대개 타격 시에는 간결한 스윙을 당부하고 퍼져 나오는 스윙을 지양하지만, 이치로는 특이하게도 퍼져 나오는 스윙을 구사했다. 그립 위치를 뒤에 남겨두는 독특한 폼은 히팅 포인트를 다양하게 가져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배트 스피드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치로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손목 힘과 끊임없는 훈련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타격 철학이다. 대부분의 타자들이 속구를 기다리고 변화구에 대응하는 것과 달리, 이치로는 "상대 투수의 가장 느린 볼을 노리고 속구에 대응한다"는 독특한 접근법을 가지고 있었다. "속구를 노리면 좋은 체인지업이나 스플리터에 손도 못 쓰고 당해버린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이치로의 타격 지표를 보면 타율은 높지만, 출루율과 장타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이치로에게는 이것조차 전략이었다. 그는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간다면 못 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자신했고, 실제로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일본에서 951경기 타율 0.353으로 리그를 평정한 이치로는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MLB에 도전장을 냈다.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그는 첫 시즌부터 157경기에 출전해 242안타를 쳐내며 아메리칸리그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2004년에는 262안타로 84년 된 단일시즌 최다안타 기록을 갈아치웠고, 10년 연속 200안타와 골든글러브라는 대기록도 남겼다. 하지만 이치로에게 이 모든 성과는 3살 때부터 시작된 그의 아버지와의 특별한 야구 여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천재의 손끝에는 노력이라는 핏방울이 묻어 있기 마련"이라는 그의 말처럼.
이러한 이치로의 접근법은 현대 MLB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 됐다. 구위와 구속이 전부 급상승한 현대 야구에서는 풀스윙으로 배럴을 노리는 것이 대세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이치로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MLB를 정복했고, 그것은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이제 그의 기록은 영원히 MLB의 역사가 됐다.
이치로가 불 지폈던 한일 라이벌리, 봉준근에게 무릎 꿇은 ‘망언 제조기’
이치로는 한국팬들에게도 특이한 존재였다.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 야구를 이기지 못하게 해주겠다." 2006년 WBC 지역예선 중 이치로가 남긴 이 발언은 한국 야구팬들의 공분을 샀다. 일본 언론은 이를 "단순히 이기는 게 아니라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고 싶다"는 맥락으로 해석했지만, 이는 한국을 향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사실 이치로의 '망언'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97년 10월 31일,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한·일 골든시리즈 기자회견. 이 자리에는 천보성, 김재박, 오오기, 호시노 감독과 선동열, 이치로, 야마모토, 이종범, 이상훈, 김동수 등이 참석했다. 한 기자가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묻자 이치로는 "공항에 내리자 마늘 냄새가 진동했다"고 답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금년 올스타전 때의 일입니다. 선동열 선배와 대결을 하였는데, 마운드에서 뿜어대는 선 선배의 마늘 냄새는 타석에 있는 나를 혼수상태에 빠지게 하여 볼카운트를 잃어버릴 정도였어요"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조희준은 "이치로가 농담을 할 의도였다는 부분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밝혔지만, 이는 한국인의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실수였다.
그리고 2009년 WBC. 이치로는 봉중근을 상대로 9타수 1안타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봉중근의 '스니키 패스트볼'에 철저히 봉쇄당했다. 이치로는 허구연과의 인터뷰에서 "정말 한국 야구 무섭다. 겁난다. 자신이 없다", "봉중근은 스니키 패스트볼이라서 공을 알고도 못 치겠다"며 한국 야구의 수준을 인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봉중근은 평소 이치로를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꼽았고, 그의 등번호 51번을 따라 달기도 했다. 원래 타자였던 봉중근이 투수로 전향한 이후에도 이치로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었다.
2012년, 이치로는 오릭스에 입단한 이대호를 만나 "한국 팬들이 나를 안 좋아할 것 같다. 아직도 나를 미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대호는 "승부의 세계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한국인들도 이해해 주실 것이다"라고 답했고, 이치로는 기분 좋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망언들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지만, 적어도 후회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한일전이 양국에 특별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치로의 오만한 발언들은 한국 야구 발전의 또 다른 동력이 됐다. 일본 야구가 역사적으로나 실력적으로 좀 더 앞서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이치로의 망언은 한국 야구계에 단순한 분노를 넘어선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냈다. 봉중근이 이치로를 상대하면서 자신의 투구 스타일을 완성했듯, 한국 야구는 일본을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했다. WBC에서의 한일전은 더 이상 일방적인 경기가 아닌, 세계가 주목하는 명승부의 대명사가 됐다. 이치로와 봉중근의 관계처럼, 한일 야구는 이제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존중하는 진정한 라이벌로 성장했다. 이것이야말로 이치로가 한국 야구에 남긴 의도치 않은 유산이었다.
아시아 야구의 두 개척자, 후배들의 MBL 교두보가 된 이치로와 박찬호의 도전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 선수는 검증되지 않은 모험에 불과했다. 특히 아시아 출신 야수에 대한 평가는 더욱 냉혹했다. 체격 조건이나 파워 면에서 메이저리그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것이란 편견이 지배적이었다. 1995년 노모 히데오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토네이도 신드롬'을 일으키며 첫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지만, 이마저도 투수라는 특정 포지션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2001년 이치로의 데뷔는 충격적이었다. 아시아 최초의 포지션 플레이어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치로는 첫 시즌부터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타율 0.350에 242안타를 때려내며 리그를 평정했고, 타격은 물론 수비와 주루에서도 최정상급 기량을 선보였다. 체격과 파워가 전부라고 여겨졌던 메이저리그에서 이치로는 기술과 스피드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이는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아시아 선수 평가 기준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한국 야구의 새 지평을 연 것은 박찬호였다.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 및 성공한 선수가 됐다. 특히 1997년 14승, 1998년 15승, 2000년 18승을 거두며 확실한 메이저리그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통산 124승은 아시아 선수 통산 최다승 기록. 박찬호의 성공은 한국 선수들의 실력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됐고, 이후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한국 선수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됐다.
이치로와 박찬호의 성공은 자국 야구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마쓰이 히데키, 구로다 히로키, 다르빗슈 유 등 일본의 메이저리거들이 이치로의 뒤를 이었고, 김병현, 서재응, 최희섭, 추신수, 류현진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메이저리거들도 박찬호의 길을 따랐다. 이제는 오타니 쇼헤이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고, 김하성과 이정후 같은 차세대 스타들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다. 두 선구자가 개척한 길은 이제 후배들에게 꿈이 아닌 현실이 됐다. 이치로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그 길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99.7%의 완벽보다 값진 0.3%의 부족함, 한국 야구의 미래를 그리다
작년 한 해, 오타니의 전설적인 활약에 흠뻑 취했던 일본은 새해부터 들려오는 이치로의 소식에 현재 축제 분위기이다. 이치로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단순히 한 선수의 영예로만 볼 수 없다. 단 한명의 선수가 1억2000만을 감동케 하고 있다.
박찬호의 MBL 첫 진출과 다저스에서의 성과는 한국인들에게는 단순한 스타 이상의 가치를 주었다. 당시 한국은 IMF라는 암울한 사회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머나먼 해외 땅에서 보란 듯이 역경을 헤쳐 나가는 박찬호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이 되었다. 이치로와 박찬호. 자국을 대표하는 단 한명의 선수가 그 나라에 미친 긍정적 영향력은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스포츠가 선사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국익이다.
작년에 열린 WBSC 프리미어 12에서 한국 야구는 쓴맛을 봤다. 일본은 물론 대만에게도 패하며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 한때 세계 랭킹 3위까지 올랐던 한국 야구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일본은 오타니의 맹활약으로 MLB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에게 절망이 아닌, 또 다른 도전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한일 양국의 야구 발전사는 닮은 점이 많다. 이치로가 일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물꼬를 텄다면, 박찬호는 한국 선수들에게 같은 역할을 했다. 두 선수 모두 처음에는 편견과 마주해야 했고, 그것을 실력으로 극복했다. 그들이 열어놓은 길은 후배들에게 더 넓은 기회가 됐다. 이제 류현진, 추신수, 김하성으로 이어지는 한국 선수들의 활약상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결국 이치로의 명예의 전당 입성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일본 야구가 이룬 성과에 자극받되,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이치로가 그랬듯, 박찬호가 그랬듯,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쿠퍼스타운에 이름을 남길 선수가 나올 것이다. 영원한 전설이 된 이치로가 남긴 이정표는, 한국 야구가 꿈꾸는 새로운 미래의 이정표이기도 하다. "불완전함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던 이치로의 말처럼, 우리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한국과 일본은 때로는 라이벌로, 때로는 선의의 경쟁자로 아시아 야구를 이끌어왔다.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배우며 성장했다. 이치로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아시아 야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이제 우리는 그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99.7%의 완벽함보다, 그 0.3%의 부족함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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