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손기정의 일장기, 국력 성장과 비례, 엘리트 체육, 안세영과 배협 구조적 문제도...

"이제는 말해야 할 때입니다." 2024 파리 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의 이 한마디가 한국 스포츠계를 뒤흔들었다. 그녀의 발언은 단순한 개인의 불만 토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엘리트 체육의 구조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신호탄이었다.안세영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선수 관리 시스템의 부재, 협회의 비민주적 운영, 그리고 선수의 자율성 침해. 이는 비단 배드민턴 협회만의 문제가...[본문 중에서]
"이제는 말해야 할 때입니다." 2024 파리 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의 이 한마디가 한국 스포츠계를 뒤흔들었다. 그녀의 발언은 단순한 개인의 불만 토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엘리트 체육의 구조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신호탄이었다.안세영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선수 관리 시스템의 부재, 협회의 비민주적 운영, 그리고 선수의 자율성 침해. 이는 비단 배드민턴 협회만의 문제가...[본문 중에서]

2024811, 파리 올림픽의 폐막과 함께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과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금메달 13, 은메달 9, 동메달 10. 32개의 메달로 종합 순위 8위라는 기적 같은 결과를 이뤄냈다. 48년 만에 최소 인원인 144명으로 이룬 이 성과는 그 자체로 역사였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가장 적은 인원으로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수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활약을 펼쳤다.

특히 ', , '로 대표되는 양궁, 사격, 펜싱에서의 성과는 눈부셨다. 양궁에서는 김우진과 임시현이 나란히 3관왕에 올랐고, 사격에서는 16세의 반효진이 역대 한국 하계 올림픽 100번째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펜싱의 오상욱은 아시아 선수 최초로 올림픽 펜싱 사브르 2관왕에 등극했다. 이러한 성과는 대한체육회가 목표로 삼았던 금메달 5, 종합 순위 15위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찬란한 성공의 이면에는 우리가 직면해야 할 숙제들이 있다. 안세영 선수의 '폭탄 발언'으로 촉발된 배드민턴 협회와의 갈등은 한국 스포츠계의 구조적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다. 엘리트 체육 시스템의 한계와 선수 관리의 문제점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또한, 구기 종목의 부진으로 인한 참가 인원 감소는 한국 스포츠의 또 다른 과제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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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올림픽 폐막,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강대국들 사이에 이름 올린 대한민국, 시상식에 걸리는 태극기. 이제 곧 광복 79주년이다. 일제 강점기 손기정 선수가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달려야 했던 그 시절부터, 오늘날 세계 8위 스포츠 강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까지. 우리 스포츠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의 역사다. 이 순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다음 목표지는 어디인가?


가슴에 일장기 달고 뛴 손기정, 태극기 달지 못한 서러움, 스포츠로 외친 독립의 함성


"달리는 걸 멈출 순 없었습니다. 그저 달렸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말이다.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달리면서도 달리고 싶지 않았을 그 순간, 손기정은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민족의 한과 독립의 열망이 실렸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단순한 스포츠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민족의 기개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일제 강점기, 스포츠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항의 몸짓이었고, 독립의 외침이었다. 1919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스포츠를 장려했다. 하지만 그들의 속셈은 뻔했다. 조선인의 기를 꺾고 동화시키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의 젊은이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스포츠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도구였다.

1920년 창립된 조선체육회는 그 중심에 섰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기르자"는 구호 아래, 그들은 체육을 통해 독립의 꿈을 키워갔다. 축구, 야구, 육상 등 다양한 종목에서 조선 선수들은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의 활약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일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한국 스포츠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손기정의 금메달, 남승룡의 동메달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손기정은 묘목을 받아 일장기를 최대한 가려보려 했다. 훗날, 동메달을 딴 남승룡이 이 묘목을 부러워했다는 말이 있다. "기정이가 우승해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또한, 동아일보가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 보도했다가 무기 정간 처분을 받은 사건은, 스포츠가 단순한 경기를 넘어 민족의 염원을 담은 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의 스포츠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독립의 의지를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6.25 전쟁 후 최빈국 된 한국, 메달 하나 따보는 것이 소원인 나라. 그때 그 시절.


전쟁의 포화가 멎고, 잿더미 속에서 일어선 대한민국. 1950년대 한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운 시절, 스포츠는 사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 한국 스포츠의 기틀이 다져졌다. 왜일까? 그것은 스포츠가 단순한 오락이 아닌, 국가 재건의 도구이자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독립 후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고 참가한 한국 선수단. 메달 하나 없이 돌아왔지만, 그들의 도전은 값진 것이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이 바로 이 시기 한국 스포츠의 원동력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은 조금씩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양정모가 레슬링 금메달을 따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 스포츠의 발전은 절대 순탄치 않았다. 열악한 훈련 환경, 부족한 지원, 국제 경험의 부재 등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선수들은 배고픔을 참으며 훈련했고, 때로는 국가를 대표해 출전하고도 자비를 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 메달 하나가 주는 의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 시기 한국 스포츠는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진국들과의 격차, 일본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분단된 조국의 현실. 이 모든 것들이 선수들에게는 극복해야 할 과제이자, 동기부여였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해내야만 한다"는 절박함. 이것이 바로 이 시기 한국 스포츠의 핵심이었다.


80~90년대, 군사정권의 3S 정책을 위한 국가 주도의 스포츠 권장 문화의 아이러니


"빵과 서커스를 주어라." 고대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의 이 말은, 80년대 한국의 스포츠 정책을 꿰뚫는 말이기도 하다.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 - Screen(스크린), Sports(스포츠), Sex(섹스). 전두환 본인도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책은 한국 스포츠의 근간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1, 서울의 88 올림픽 유치 성공. 이는 한국 스포츠사의 대전환점이었다. 정부는 올림픽 준비를 명목으로 대대적인 스포츠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태릉선수촌의 확장, 각종 경기장 신축, 그리고 체육 특기자 제도의 확대. 이 모든 것들이 '올림픽'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올림픽 준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한국 스포츠의 체계적인 발전을 위한 토대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프로스포츠의 출범이다.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가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리그의 탄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 '스포츠 문화'를 뿌리내리는 과정이었다. 주말이면 야구장과 축구장으로 향하는 사람들, TV 앞에 모여 응원하는 가족들. 이러한 광경은 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스포츠 발전이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88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라는 구호 아래, 많은 것들이 정당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권 탄압, 강제 철거 등의 어두운 면도 있었다. 이는 한국 스포츠의 발전이 겪어야 했던 성장통이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스포츠를 끌어온 엘리트 체육, 국력과 비례한 성적. 세계 10위권


21세기, 한국 스포츠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엘리트 체육'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 주도의 체계적인 선수 육성이 이루어졌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정책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브랜드 향상,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스포츠 강국은 곧 선진국"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의 국력이 점차 세계 10위권 안팎에 도달하면서 스포츠 성적도 비례하여 성장하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한국은 종합 12위에 올랐다. 2008년 베이징, 2012년 런던에서는 종합 5위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체계적인 선수 발굴, 과학적 훈련 시스템, 그리고 국가적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였다. 특히 양궁, 쇼트트랙, 태권도 등 '효자 종목'의 꾸준한 성과는 한국 스포츠의 저력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다. 엘리트 체육 중심의 정책은 소수의 뛰어난 선수를 양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스포츠의 저변 확대에는 한계를 보였다. '메달 지상주의'로 인한 비인권적 훈련 방식,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선수들의 현실, 그리고 은퇴 후 진로 문제 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더불어 한국 스포츠의 성과가 국력과 비례한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올림픽에서의 순위가 곧 국가의 위상을 대변한다는 인식은, 때로는 지나친 부담으로 작용했다. "금메달이 아니면 의미 없다"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은 선수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겼고, 때로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2000년대 이후 한국 스포츠의 성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 10위권의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한국. 이는 단순한 스포츠 성과를 넘어, 국가 브랜드 가치 상승과 소프트 파워 증대로 이어졌다. 스포츠를 통한 '코리아 프리미엄'의 창출, 이것이 바로 21세기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안세영이 쏘아 올린 금빛 파문, 배협, 한국 엘리트 체육의 구조적 문제점 드러내


"이제는 말해야 할 때입니다." 2024 파리 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의 이 한마디가 한국 스포츠계를 뒤흔들었다. 그녀의 발언은 단순한 개인의 불만 토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엘리트 체육의 구조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신호탄이었다.

안세영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선수 관리 시스템의 부재, 협회의 비민주적 운영, 그리고 선수의 자율성 침해. 이는 비단 배드민턴 협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스포츠계 전반에 만연한 고질적인 병폐다. "메달을 따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식의 사고방식,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근원이다.

대한민국의 메이져 스포츠인 축구, 그리고 그것을 대변하는 대한축구협회의 무능. K리그가 국내에서 차지하는 관심과 위상에 비하면 배드민턴이 가지는 종목의 한계는 명확하다. 생활 체육으로서의 배드민턴은 가볍게 즐길 수 있어 인지도가 높은 반면, 국내에서 프로배드민턴의 기반은 매우 약하다. 비인기 종목인 것이다. , 취미로는 할 수 있으나, 배드민턴만 해서는 생활고를 버티기 힘들다. 그것은 비단 배드민턴뿐만 아닌, 비인기 종목의 한계이기도 하다. 특히나 한국 같이 사회 체육이 발달하지 못한 곳에서는 더더욱, 배드민턴 잘해서 먹고살 것이 없다. 이래 가지고는 비인기 종목에서의 메달 획득은 요원할 것이다.

엘리트 체육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바로 이러한 비인기 종목도 소수의 엘리트 선수 육성에 국가가 직접 나서거나 투자를 유도하는 것이다. 많은 돈을 지원할 수는 없다. 정해진 소수 엘리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운동만 하면 된다. 선택과 집중의 시간이다.

국가는 부모가 아니다. 협회에 소속된 선수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살펴볼 수 없다. 대한체육회 하위 각 종목 소속 협회들이 선수들을 직접 관리한다. 인기 종목은 굳이 대표팀에 목숨 안 걸어도 프로리그에서 경제활동이 가능하나, 이들은 아니다. 집중적으로 양성된다는 것은 이들 선수의 협회 의존도가 심함을 보여준다. 이들이 협회의 눈 밖에 나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협회는 거의 전권을 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잘못된 관행으로 임하는 경우, 선수들이 그 구조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힘들다. 이것이 이번 안세영 파문의 구조적 문제점을 유발한 엘리트 체육의 한계이다.


엘리트 체육 vs 사회 체육, 정답은 없어. 아이 키울 시간도 없는 한국. 여가, 취미 등 사회 전체 분위기 바뀌어야


광복 79주년, 그리고 파리 올림픽의 영광. 일제 강점기 손기정의 울분에서 시작해, 세계 8위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그 과정은 곧 우리 민족의 역사였고, 우리의 자긍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앞으로 우리의 스포츠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엘리트 체육이냐, 사회 체육이냐. 이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엘리트 체육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사회 체육의 저변을 넓혀 아마추어로부터 올라오는 올림픽 메달을 받아보길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풀뿌리 체육. 매우 이상적이다. 의사가 사격 금메달을, 청소부가 육상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인간적인 로망당연히 국민 건강과 건전한 체육의 모습이다. 국민 모두가 먹고살 만하고, 스포츠에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 시간과 여유가 충분하다면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우리보다 앞선 영국, 일본 같은 선진국들이 이 풀뿌리 체육을 시도해 보고자 노력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시 엘리트 체육으로 선회하고 있다. 결국, 올림픽 메달이라는 것은 한계적 싸움이다. 누가 상대보다 0.000001만큼이라도 더 뛰어난가에서 승패가 갈린다. 그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한계의 한 구간을 올리는데 드는 노력과 시간은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욱 올라간다. 경제학에서 이것은 한계비용곡선으로 나타난다. , 남보다 더욱 집중적인 투자를 하지 않으면 결국 그 약간의 차이처럼 보이는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도 될까 말까다.

우리의 사회는 풀뿌리 체육을 하기에 적합한가? 생활 체육을 펼치기 위한 인프라는 충분한가? 그럴 여유는 있는가? 불행히도 아니다. OECD 국가 중 최장 노동시간,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이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일과 삶의 균형은커녕, 아이를 키울 시간조차 없어 세계 최악의 저출산 국가가 된 것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가와 취미로 스포츠를 즐기자"는 말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 엘리트 체육을 포기하고 생활 체육 시스템으로 전환했을 때, 우리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순위조차도 장담하기 힘들 수 있다.

그렇다. 생활 체육은 이상적이지만,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체를 리뉴얼하는 수준의 대공사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한계에 봉착한 엘리트 체육의 문제점을 그냥 모른 채 넘어가자는 것은 아니다. 안세영의 폭로는 그것을 변화시킬 작은 시작점에 불과하다. 엘리트 체육도 아닌, 생활 체육도 아닌 제3의 길이 필요한 시기이다. 선진국들의 사례만 따라가는 것이 아닌, 우리 실정에 맞는 체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의 협회가 욕을 먹는 것은 단순히 선수를 억압하고 방치했던 것도 있지만, 아마추어 육성에 필요한 지원과 노력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체육계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79년 전, 우리는 광복을 맞이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새로운 독립을 꿈꾸어야 한다. 메달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스포츠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맞이해야 할 새로운 광복의 모습이다. 파리 올림픽의 영광을 뒤로하고, 이제 우리는 더 큰 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길에 정답은 없다. 다만 우리 모두의 지혜와 노력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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